밤이 깊을수록 선명해지는 남미의 지도
어둠이 내린 방, 컴퓨터 모니터의 푸른 빛만이 책상 위를 은은하게 비춘다. 모니터 화면에는 남미 대륙의 거대한 지도와 수없이 많은 항공권 검색 창이 줄지어 열려 있다.
12월, 홀로 떠날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이과수 폭포, 그리고 리우데자네이루의 붉은 노을을 그려본다. 이어지는 2월, 마음 맞는 이들과 함께 페루를 출발해 남미의 깊은 속살을 엮어낼 긴 여정까지.
특히 2월 여정은 처음 뜻을 모든 다른 지역 코이카 단원과 동행한다. 나보다 다섯 살이나 많은 인생의 선배이지만, 낯선 대륙에서 함께 걸을 동행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해진다. 게다가 홀로 여행할 때보다 경비를 꽤 아낄 수 있으니 이보다 더 고마운 조합이 어디 있을까.
누군가는 이 나이에 왜 사서 고생을 하느냐고, 편안한 패키지 여행을 두고 왜 머리를 싸매느냐고 묻곤 한다. 하지만 나는 밤마다 화면 속에서 도시와 도시를 선으로 잇고, 시간을 조각하는 이 순간이 참 좋다. 가보지 않은 낯선 거리의 이름을 나지막이 읊조리다 보면, 내 마음은 이미 지구 반대편의 바람 속에 가 닿아 있다. 여행은 비행기에 몸을 싣는 순간이 아니라, 바로 이 고요하고 설레는 밤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길을 짜는 사람만이 갖는 머릿속 지형도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예약한다는 것은 벅찬 설렘인 동시에 묵직한 책임이다. 항공 시간표를 몇 번씩 뒤엎고, 도시마다 안전하고 따뜻한 잠자리를 찾아 여러 숙박 사이트 창을 밤새 열고 닫는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버스 편을 확인하고, 언어도 잘 통하지 않는 낯선 땅의 예약 시스템과 씨름을 이어간다.

그렇게 며칠 밤을 지새우다 보면 문득 가슴 한구석이 뻐근해지는 신기한 일이 생긴다. 아직 가보지도 않은 낯선 도시의 골목길, 환승역의 계단, 모퉁이를 돌면 나타날 작은 광장의 풍경까지… 어느새 내 머릿속에 하나의 또렷한 지도로 살아 숨 쉰다. 내 손으로 직접 찾고, 고민하고, 길을 만들어 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머릿속의 지도다.
물론 그 길 위에는 늘 뜻하지 않은 파도가 친다. 아르헨티나 항공에서 리마 출발 비행기가 결항 되었다며 하루를 당기라는 무심한 메일이 날아왔을 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렵게 맞춰둔 일정 전체가 도미노처럼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진땀을 흘리며 취소 환불을 신청하고 라탐 항공의 대체 편을 찾아 다시 결제하기까지, 내내 마음을 졸였다.
그뿐인가. 2월 푸노 카니발을 위해 일찍이 예약해 둔 숙소에서는 “축제 대목이라 손해가 크니 며칠 더 묵든지, 아니면 에어비앤비 앱에서 당신이 직접 취소하라”는 황당하고 배짱 두둑한 통보가 날아오기도 했다. 처음엔 화도 나고 억울했지만, 1년 중 가장 큰 축제 대목 하나만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현지 숙소 주인들의 사정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갔다. 이방인으로서 겪어야 할 소동을 다스리며 앱 고객센터를 통해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문제를 풀어냈다. 이 모든 좌충우돌과 머리를 싸매는 밤들조차,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 찬란한 과정이다.
▣ [Yesook’s Travel Tip] 낯선 길 위에서 나를 지키는 예약 노하우
⚪ 항공 검색은 ‘구글 플라이트‘ 다구간으로, 결제는 ‘항공사 공식 홈페이지‘에서: 스카이스캐너나 트립닷컴 등도 참고하지만, 구글 플라이트(Google Flights)에서 최적의 다구간 노선을 확인한 뒤 항공사 공식 사이트에서 직접 예매하면 대체로 저렴하고, 결항이나 변경 시 대처도 가장 깔끔하다.
⚪ 숙소 소통은 반드시 ‘자체 플랫폼 앱 메시지‘로: 예약 취소 요구나 금전적 분쟁이 생겼을 때 개인 왓츠앱(WhatsApp)으로 나눈 대화는 플랫폼이 확인하기 어려워 보호를 받기 힘들다. 에어비앤비나 아고다 등 해당 예약 앱 안의 메시지 기능을 이용해야 플랫폼의 공식적인 보호와 환불 처리를 받을 수 있다.
코이카 단원만이 누릴 수 있는 유쾌한 특권
사실 내가 이렇게 다시 배낭을 꾸리는 데는 아주 현실적이면서도 특별한 이유가 있다.
한국에서 작정하고 남미 여행을 오려면 항공권과 일정까지 천만 원이 훌쩍 넘는 큰돈과 거창한 결심이 필요하다. 하지만 나는 지금 지구 반대편, 남미의 한복판 페루에 살고 있지 않은가! 르완다에 봉사단원으로 머물던 시절 “아프리카에 왔으니 이 거대한 대륙의 속살은 꼭 눈에 담아봐야지!” 하고 길을 떠났던 것처럼, 페루에 있는 지금 남미 대륙을 품어보지 않는다면 두고두고 아쉬울 것 같았다.

그렇다고 기관에서 여행 비용을 대주는 것은 절대 아니다. 주어진 생활비를 아끼고 아껴 만드는 ‘알뜰한 짠물 여행’이지만, 현지라는 거점에 서서 남미 각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표를 끊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낯선 땅에서 땀 흘리는 코이카 봉사자로서 누릴 수 있는 가장 근사하고 유쾌한 특권이 아닐까.
욕심을 비워낸 자리에 채워진 다른 여행의 결
돌아보면 젊은 날의 여행은 욕심이고 조바심이었다. 하나라도 더 봐야 한다는 강박에 세상을 마구 들이켰고, 밤차에 몸을 싣고 도미토리의 삐걱거리는 2층 침대에서 잠을 청해도 젊음이라는 밑천이 있었기에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60대에 접어든 지금, 내 여행의 기준은 부드럽게 결을 달리한다.
⚪ 얼마나 많은 곳을 찍고 오느냐보다, 얼마나 내 호흡대로 깊이 숨 쉬며 걸을 수 있는가를 먼저 생각한다.
⚪ 몸을 혹사하는 낡은 도미토리 대신, 지친 하루의 피로를 안온하게 녹여줄 작고 편안한 숙소를 찾는다.
⚪ 아끼되, 몸을 갉아 먹는 절약은 하지 않는다. 몇 푼 아끼려고 고단한 환승을 거치는 표보다는, 내 체력과 시간을 아껴주는 다정한 동선을 먼저 따져본다.
⚪ 유명한 명소 앞에서 남기는 인증사진보다, 그곳의 햇살과 바람 속에서 내가 무엇을 느끼며 조용히 익어가는지를 들여다본다.
세상을 향한 호기심이 줄어든 것이 아니다. 내 몸의 한계와 시간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한 걸음 한 걸음을 더 깊고 단단하게 대하게 된 것뿐이다. 챙겨야 할 계산과 변수는 늘어났지만, 낯선 세상을 향해 쿵쿵 뛰는 내 가슴의 온도만큼은 청춘의 그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멈추지 않는 한, 인생의 지평선은 계속 넓어진다
은퇴는 내 삶의 뒷전으로 물러나 멈춰 서는 시간이 아니다. 타인이 그려준 궤적을 벗어나, 내가 진정으로 갈망하던 삶의 지도를 내 손으로 직접 그려나가는 가장 자유로운 시작이다.
이 나이에도 새로운 기술을 익히고, 낯선 나라의 비행기 표를 비교하며, 지구 반대편의 이웃들과 삶을 나누고 글을 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여행이 끝난 자리에서 또다시 다음 여행을 꿈꾸며 눈을 반짝일 수 있다는 것. 참 감사하고 눈부신 일이다.

문득 스스로에게 나지막이 물어본다.’나는 과연 언제까지 이렇게 배낭을 메고 낯선 땅의 좌표를 찾아 헤맬 수 있을까?‘
그러나 그 질문 끝에 굳이 답을 달아두지는 않으려 한다. 다만 분명한 것은, 아직도 내 가슴을 뛰게 만드는 여행지가 저 너머에 수없이 남아 있고, 비행기 표를 검색하는 이 밤의 설렘이 여전히 내 삶을 뜨겁게 적시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 삶의 지평선은 끊임없이 넓어지고 있다. 나는 오늘도 설레는 마음으로, 내 앞에 놓인 다음 지도를 가만히 펼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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