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Yesook Jin

  • 지도가 발밑이 되던 날

    지도가 발밑이 되던 날

    아득하던 대륙이, ‘일상‘이 될 때

    문득 지갑을 정리하다, 오래된 버스표나 꼬깃꼬깃해진 국경 통과 영수증이 떨어질 때가 있다. 그러면 거짓말처럼, 그 뜨겁고 붉은 대기의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한국에서 바라보던 아프리카와 남미는 지구 반대편의 막연하고 먼 미지의 땅이었다. 뉴스 화면 속 기근과 분쟁, 혹은 다큐멘터리 속 초원을 가로지르는 야생동물 떼 — 딱 그 정도의 납작한 이미지로만 존재하던 대륙이었다.

    그런데 막상 그곳에 ‘살게 되면서’, 생각지도 못한 마법 같은 변화가 일어났다. 지도 위의 까만 점에 불과했던 나라들이, 어느새 내 삶의 좌표가 되어 있었다. 며칠 머물다 스쳐 가는 관광객의 시선이 아니라, 그 땅의 붉은 흙먼지를 신발 밑창에 묻히고 그 묵직한 공기를 매일 들이마시는 ‘생활자’의 시선으로 나는 비로소 대륙을 마주하게 되었다.

    르완다 — 국경을 넘어 아프리카를 품다

    르완다에 살기 전, 나에게 아프리카는 여행지가 아니었다. 후원 캠페인 홍보 영상 속에서나 스쳐 지나가던 땅, 헐벗은 아이들과 마른 대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결코, 내 삶이 닿을 수 없는 아득히 먼 세계였다.

    하지만 살다 보니, 인접한 국경을 버스에 몸을 싣고 육로로 넘는 날들이 생겼다. 비행기를 타야만 바다를 건널 수 있던 한국에서의 삶과는 완전히 다른 결의 세계였다. 덜컹거리는 버스 창밖으로 스쳐 가는 황토빛 언덕들, 국경 초소에서 여권에 도장이 쿵 하고 찍히는 그 찰나의 긴장과 설렘. 버스 한 번으로 나라와 나라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경험은 그 자체로 신비로움이었다.

    주말과 휴일을 이용하고, 때로는 고단한 일상에 쉼표를 찍듯 휴가를 얻어, 나는 자연스럽게 이웃 나라들로 발걸음을 옮겼다. 우간다의 초록 언덕을 지나고, 케냐의 광활한 평원을 달리고, 탄자니아의 바람을 맞았다.

    이집트의 거대한 유적 앞에 서기도 했고, 짐바브웨와 잠비아를 가르는 대지의 물보라를 맞으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끝자락까지 닿았다. 지도 위에 점처럼 흩어져 있던 그 낯선 이름들이, 하나씩 내 두 발이 직접 딛고 지나온 온기 어린 자리로 바뀌어 갔다.

    관광객이 아니라 ‘현지인‘의 호흡으로 걷던 여행

    그 여정들은 패키지 투어의 유명 명소를 도장 찍듯 스쳐 지나가는 여행과는 결코 같을 수 없었다.

    울퉁불퉁한 흙먼지를 날리는 현지 대중교통, 마타투나 모토바이크에 올라타기도 했고, 짐을 가득 실은 낡은 버스에 몸을 구겨 넣기도 했다.

    왁자지껄한 로컬 시장에서는 귀를 간지럽히는 낯선 언어의 흥정 소리, 향신료와 흙먼지가 뒤섞인 대기의 냄새, 손짓 발짓으로 나누던 어설픈 대화들이 있었다.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소박한 마을의 나무 그늘 아래서 낯선 이들과 눈을 맞추고 손을 흔들었다.

    그것은, 오직 그 땅에서 치열하게 살아본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특별하고 깊은 유대의 여행이었다.

    페루 — 우아누코가 새로운 여행의 출발점이 되다

    아프리카의 뜨거운 붉은 대지를 지나, 지금 나는 페루 우아누코(Huánuco)에 정착해 남미라는 또 다른 거대한 대륙의 숨결을 마주하고 있다.

    장소는 바뀌었지만, ‘이곳에 살고 있기에’ 누릴 수 있는 설렘은 여전히 유효하다. 구름 사이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고대 석축 도시 마추픽추의 신비, 수억 년의 시간과 지층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낸 5천 고지 무지개 산 비니쿤카의 형형색색 능선, 눈이 시리도록 파란 안데스의 거대한 고산 호수의 정적 — 그 모든 풍경을 나는 이미 내 품에 안았다.

    그리고 이제, 나는 페루를 넘어 남미 대륙 전체를 향한 새로운 지도를 펼치고 또 한 번의 거대한 발걸음을 조용히 준비하고 있다.

    내가 얻은 것은, 새로운 여행지가 아니라 ‘사는 눈‘이었다

    며칠 머물다 호텔로 돌아가는 이방인이 아니라, 그곳의 언어를 배우고 삶의 고단함을 견뎌내며 살아본 사람이기에 비로소 얻을 수 있는 시선이 있다.

    같은 풍경을 보아도, 관광객은 카메라에 풍경을 담고 떠나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은 그 풍경 뒤에 숨은 사람들의 땀방울과, 그 땅이 품고 있는 시간의 결까지 고스란히 읽어낸다. 그것이 내가 두 대륙의 거친 품에서 건져 올린, 가장 값지고 유일한 보물이었다.

    낯선 땅이 내게 건넨, 가장 눈부신 선물

    처음에는 누군가를 돕고 봉사하기 위해 이 낯선 땅에 날아왔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내가 눈뜨고 숨 쉬는 그 삶의 터전 자체가 거대한 여행지가 되어 있었다. 낯선 곳에 뿌리를 내리자, 그 대륙이 여행지가 되었다.

    어쩌면 이것이, 낯선 나라의 불편함과 외로움을 기꺼이 묵묵히 살아낸 사람에게 하늘이 허락한 특별한 선물인지도 모르겠다.

    봉사자였고, 결국 여행자가 되었다.

    나는 단지 대륙을 구경하러 떠돌던 여행자가 아니었다.

    나는 그 한 대륙의 치열한 삶 속으로, 조금씩, 그러나 가장 깊숙이 걸어 들어갔던 것이다.

    지도 위의 먼 이름이었던 두 대륙은, 어느새 내 발밑의 땅이 되어 있었다.

    ※ 한 편의 글에 그 넓고 찬란한 대륙의 기억을 다 담아내기란 애초부터 무리이다. 지평선 너머로 저물던 아프리카의 노을과 안데스의 만년설 아래 새겨둔 구체적인 여행 기록들은, 이제 다음 글들에서 하나씩 찬찬히 꺼내어 풀어놓으려 한다.

  • 세상과 잇던 탯줄이 끊어지던 날 — 르완다와 페루, 두 번의 도난

    세상과 잇던 탯줄이 끊어지던 날 — 르완다와 페루, 두 번의 도난

    르완다, 후예 — 손가락에서 낚아채인 것

    적도에 가까운 땅 르완다의 햇볕은 늘 강렬했다. 그 뜨거움이 한풀 꺾이는 오후 5시는 나의 어김없는 산책이자 러닝 타임이었다. 6개월이 넘도록 늘 다니던 익숙한 산책길. 작은 도시 후예(Huye)에서 동양인 여성인 나, 이른바 ‘무중구(Muzungu)’의 존재는 늘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나는 평소 누군가의 타깃이 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건은 여느 날과 다름없는 일요일 오후에 일어났다. 길옆 교회에서 쏟아져 나오는 인파로 거리가 북적였다.

    바로 그때였다. 허름한 차림에 슬리퍼를 질질 끌고 다가온 한 남자가 내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휴대폰을 사정없이 낚아챘다. 하지만 손가락의 고리에 걸려 휴대폰이 쉽게 빠지지 않자, 그는 나를 바닥에 밀쳐버리고는 손가락에서 억지로 폰을 빼내 들고 달아났다.

    “Help me!“

    목이 터져라 외쳐야 하는데 입술마저 열리지 않았다. 그 광경을 뻔히 지켜보던 인파 속에서, 한 신사가 나와 함께 그를 쫓아주었다. 하지만 남자는 슬리퍼마저 벗어 던지고 르완다의 언덕길을 타고 질주했다. 그리고 어디론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도망친 도둑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동안, 손발이 사정없이 떨렸고 입술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휴대폰이 없으니 누구에게도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근처에 살던 코이카 동료의 집 문을 두드렸다. 혹시 증거가 될까 싶어 도둑이 버리고 간 슬리퍼를 손에 든 채 횡설수설하는 나를 보고, 그는 나보다 더 당황했다.

    경찰서에서 돌아온 대답

    경찰의 태도는 미온적이었다. “삼성 폰이 정품이냐, 시리얼 넘버가 어떻게 되느냐.” 그제야 알았다. 중국산 가짜가 판치는 현지 사정도, 해외 나올 때는 기기의 시리얼 번호까지 메모해 두어야 한다는 철칙도.

    이어진 말은 더 절망적이었다. “절대로 르완다 내에서는 그 폰이 열리지 않을 겁니다. 국경을 넘어 가까운 콩고에서 켜질 가능성이 크지요.” 결국, 찾기는 어렵다는 결론이었다.

    신고를 마무리했고, 코이카 사무소에도 보고해야 했다. 안전 코디네이터와 현지인 담당이 후예 경찰서와 몇 차례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때 곁에서 나를 다독여준 동료 단원이 없었더라면, 그 아찔한 고립감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파견 전에 준비해 두었던 예비 폰을 연결하고서야, 나는 다시 세상과 이어질 수 있었다.

    이틀 후, 경찰서에서 문자가 날아왔다. 신용카드와 르완다 ID가 경찰서로 돌아왔다고. 하지만 폰은 없다는 소식이었다.

    현지 담당 코디네이터가 도둑을 계속 추적하겠냐고 물었다.

    순간 망설였다. 도둑을 찾아 벌을 받게 한들, 이 작은 시골 마을에서 외국인인 내가 그 후에 어떤 화를 입을지 알 수 없었다. “그만두겠다.”고 하자 “잘 생각했다.”는 속 편한 대답을 건넸다.

    보는 눈이 그렇게 많았고 그 작은 동네에서, 그들이 그 도둑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런데도 굳이 들추지 않는 것. 그것이 이곳 사람들이 자국민을 지키는 그들만의 방식이었을 것이다 —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짐작일 뿐이지만. 그 묘한 침묵 앞에서, 이방인으로서의 서글픈 무력감이 밀려왔다.

    후예는 그런 곳이었다. 버스터미널에서 모토를 타고 오는 길, 다른 전화를 받느라 목적지를 말해주지 않았는데도, 기사는 영락없이 내 집 앞에 나를 내려주었다.

    사실 그날은 다른 곳에 갈 약속이 있었는데도 말이다. 내가 누구이고 어디에 사는지가 이미 온 동네에 노출되어 있다는 뜻이다.

    어느 날은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하느라 길가 처마 밑에 섰다. 그곳에서 만난 양말 장수 여인이 이것저것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낯선 언어의 질문에 내가 당황해 멈춰 서 있자, 곁에서 함께 비를 피하던 우무뇬지(자전거 택시 기사)가 나서서 유창하게 내 신상을 털어놓았다.

    “저 사람은 CJSM 학교에서 일하고, 집은 저기야.”

    등골이 서늘해졌다. 나의 일거수일투족이 이 작은 도시의 투명한 유리알처럼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 그 순간, 언제든 범죄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공포가 엄습했다.

    페루, 다시 찾아온 같은 질문

    그런데, 삶은 가끔 아주 비슷한 질문을 전혀 다른 장소에서 다시 던지곤 한다. 페루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한 번 데었으니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줄 알았다. 페루 우아누코의 토요 시장에서 장을 보고 짐이 가벼워 버스를 탔다. 집 앞에 내려 가방을 확인하는 순간, 휴대폰이 사라졌다는 걸 알았다.

    휴대폰 안에는 연락처, 수많은 사진, 일상의 지도, 은행 계좌, 번역기, 인터넷, 그리고 현지 사람들과 이어지는 선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휴대폰을 잃는다는 건, 단순히 비싼 물건 하나를 분실하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낯선 땅에서 나를 세상과 이어주던 유일한 창 하나가, 소리 없이 닫히는 일이었다.

    르완다 때와는 달랐다. 집에 돌아와 노트북의 메신저 창을 열어 동료 단원에게 도움을 청했다. 야무진 그 동료는 먼저 아이폰 찾기부터 설정하고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기기는 이미 전원이 꺼진 뒤였다.

    코이카 페루 사무소에 연락하자 공식적인 경찰 신고를 권했다. 그 안내에 따라, 나는 평소 친분이 두터운 코워커와 기관장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들이 기꺼이 함께 경찰서로 동행해주었다.

    한국의 신속하고 체계적인 시스템과는 사뭇 다른, 페루 특유의 느긋한 속도와 처리 과정은 속이 탈 만큼 답답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진심을 다해 도와주려 애쓰는 마음이 전해졌다. 여러 장의 조서가 만들어졌고, 그 서류를 들고 클라로(Claro) 대리점에 달려가 예비 폰을 개통했다.

    그 순간에도 생각했다. 곁에서 도와준 동료가 없었더라면, 인터넷이라는 비상구가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연결이 끊어진다는 것

    결국, 두 나라에서 모두 휴대폰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내가 잃어버린 것은, 휴대폰만이 아니었다. 휴대폰 하나가 사라지는 순간, 세상과 나를 잇던 탯줄 같은 끈 하나가 통째로 끊어진 것 같았다.

    휴대전화와 인터넷 공간은 이방인에게 단순한 편의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거친 대지를 항해하는 지도이자 언어이고, 모국인 한국과 연결된 유일한 생명줄이다. 그것을 통째로 빼앗겼을 때 엄습하는 눈앞이 캄캄한 막막함을 누가 알겠는가.

    비로소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낯선 땅에서 내가 얼마나 많은 보이지 않는 선에 의지해 하루하루를 숨 쉬고 있었는지를.

    이 아찔한 소동을 지나며, 낯선 환경에 대처하는 또 하나 비장한 나만의 생존 노하우를 장착했다.

    “이런 일마저도, 훗날에는 웃으며 추억할 수 있겠지.“

    지구 반대편 우아누코에서의 삶은, 오늘도 그렇게 거친 바람을 맞으며 한 뼘 더 유연해지고 있었다.

  • 이방인이 앓는 밤 — 혼자 견뎌야 했던 시간들의 외로움

    이방인이 앓는 밤 — 혼자 견뎌야 했던 시간들의 외로움

    이방인이 앓는 밤

    KOICA 봉사자로서 나는 늘 씩씩하고 밝은 사람으로 비쳤을지 모른다.

    하지만 낯선 땅에서의 삶이 어찌 매 순간 축제일 수만 있을까. 특히 몸이 아픈 날이면, 홀로 앓아누워 흘려야 했던 눈물 속에서 생각보다 훨씬 깊은 외로움이 밀려왔다.

    아픈 몸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곁에 기댈 곳이 없다는 막막함이었다. 르완다에서는 아메바성 장염을 몇 번이고 앓았고, 페루에서는 오른팔이 불쑥 빠져버리는 사고를 겪었다. 몸이 무너져 내릴 때면 마음의 성벽도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그 순간, 나는 어쩔 수 없는 한 사람의 외로운 이방인이었다.

    르완다, 후예(Huye) — 아메바와의 첫 싸움

    2018년부터 2020년 3월까지, 나는 르완다의 작은 도시 후예(Huye)에서 살았다. 청각장애 학교인 CJSM 이 나의 삶터였다.

    활동 연장을 위해 코이카의 절차에 따라 건강검진을 받았다. 그리고 결과지를 받아 들었을 때, 믿기 어려운 결과가 나왔다. 아메바균 양성. 아무 증상도 느끼지 못했기에, 믿고 싶지 않았다.

    같은 학교에서 활동하던 JICA 단원이 그 병으로 고생하는 것을 보아왔기에 그 지독한 고통을 잘 알고 있었다. 면역력이 떨어지면 언제든 고개를 드는 병이었다. 연장 승인의 절대 조건은 오직 ‘단원의 건강’이었기에, 본부에서는 엄격한 치료 증빙을 요구했다.

    처방받은 약의 독성은 마치 항암 치료를 받는 것과 같았다.

    침대 난간을 붙들고 뒹굴며 견뎌야 하는 시간들이었다.

    속이 뒤집히고, 먹은 것을 전부 토해내는 고통 속에서, 불현듯 서글픈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선교사라면 이 땅에서 세상을 떠나는 것을 순교라 하겠지만, 봉사자가 이 낯선 땅에서 아프다 죽으면 과연 무엇이라 부를까. 나는 과연 한국 땅에 묻힐 수 있을까.’

    가족들의 얼굴이 차례로 스쳐 지나가던, 잠 못 이루던 밤들의 서늘한 공기가 아직도 생생하다. 원인은 청각장애 학생들에게 수영을 가르치다 피치 못하게 입으로 들어간 물 때문이었을 것이다.

    키갈리(Kigali), 레메라(Remera) 보건소 — 반복된 장염

    3년 뒤, 나는 르완다의 수도 키갈리에 있는 레메라 보건소로 재파견되었다. 그곳에서 다시 두 번의 장염을 앓았다. 아마도 날것의 채소가 원인이었을 터라, 외식은 철저히 피했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식탁의 음식을 먹어도, 늘 다른 사람들은 멀쩡하고 나만 앓아누웠다.

    아픈 배를 움켜쥔 채 채변을 해 들고 보건소로 향하던 발걸음. 한 시간 뒤 밝혀진 결과는 역시나 아메바였다. 다행히 내 활동 기관이었기에 보건소장이 직접 나서 빠른 조치와 처방을 도와주었지만, 정작 그들은 심각한 나를 보며 “괜찮아질 거야”라며 해맑게 웃고 있었다. 그들에게 아메바성 장염은 일상의 흔한 풍경이었던 것이다.

    아플 때는 온 세상이 캄캄해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독한 약효로 겨우 정신이 돌아왔을 때 비로소 깨닫게 된다. 곁에서 무심한 듯 손을 내밀어 주던 현지 사람들이 얼마나 고마운 존재였는지를.

    페루, 두 번 빠진 오른쪽 팔

    지금 살고 있는 페루 우아누코에서는, 팔이 두 번이나 빠지는 아찔한 일을 겪었다. 한 번은 곁에 있던 단원이 급히 당겨 맞춰 주었고, 또 한 번은 팔을 부여잡은 채 모토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달리던 중 도로의 거친 둔턱을 넘는 충격 덕분에 팔이 제자리로 툭 돌아오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병원. 페루 ID를 버젓이 가지고 있음에도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접수가 지체되었다. 기관장에게 연락해 신분확인을 마치고 나서야, 접수가 이루어졌다.

    의사 앞에 앉은 나는, 열악한 병원 환경을 마주하자 오히려 치료받기 두려워지는 마음이 엄습했다. 썩 좋아 보이지 않는 위생 상태에 오히려 병균을 얻어올까 겁이 났다. 다행히 팔은 스스로 제자리를 찾아 별다른 처치는 면했지만, 그 와중에도 한걸음에 병원으로 달려와 준 기관장의 모습은 거친 모래밭 속의 샘물처럼 깊은 안도를 안겨주었다.

    낯선 땅에서 아프다는 것은 이토록 두려운 일이었다. 국토가 작아 서너 시간이면 수도 키갈리에 닿던 르완다와는 달리, 페루는 그야말로 다른 세계였다. 우아누코에서 리마까지 버스로 8~9시간, 비행기로도 1시간이 걸리는 거대한 땅. 응급 상황을 떠올리면 아찔한 공포가 밀려온다. 아프지 말아야지, 조심하고 또 조심하지만 이 광활한 자연과 일상의 변수를 어찌 다 피해갈 수 있겠는가.

    혼자 남겨진 계절

    우아누코의 동료 단원들이 하나둘 활동을 마치고 떠났다. 함께 페루 땅을 밟았던 동기들도 모두 짐을 쌌다. 1년을 연장한 나만 홀로 남겨진 텅 빈 자리. 비록 평소에도 각자의 자리에서 바빠 자주 만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지척에 한국어로 온기를 나눌 이가 없다는 사실이 새삼 서럽고 가슴을 저리게 했다.

    내 마음을 아는 듯, 새벽까지 유난히 거칠게 내리던 빗소리에, 그만 맘 놓고 울었다.

    단단해지는 시간

    아팠다. 몸도, 마음도.

    당황스러웠고, 서러워 눈물도 흘렸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 모든 생채기의 시간을 지나고 나니, 나는 어느새 조금 더 단단한 결을 지니고 있었다.

    낯선 땅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혼자서 모든 것을 악물고 견뎌내는 일이 아니었다. 도움이 필요할 때, 누군가에게 기꺼이 손을 내미는 법을 배워가는 다정한 과정이었다.

    우아누코에서 허락된 남은 1년.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1년처럼, 하루하루를 온 마음을 다해 살아내리라.

  • 페루 우아누코 일기 – 60대에 다시 만난 두 번째 청춘, 숫자가 지워진 땅

    페루 우아누코 일기 – 60대에 다시 만난 두 번째 청춘, 숫자가 지워진 땅

    숫자가 지워진 땅에서

    한국에서 60대라고 하면 은근히 나이의 무게를 짊어지고 점잖게 행동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가 있다. 하지만 우아누코(Huánuco)의 뜨거운 태양 아래, 이방인으로 활보하는 나는 그들에게 이미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젊고 활기 있는 동양인 언니(또는 누나)’ 그 자체였다.

    한국에서 내 나이는 슬며시 사려 깊은 어른의 무게를 얹어야 할 숫자였지만, 우아누코의 시장 바닥과 골목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눈은 완전히 달랐다. 그들에게 이곳의 60대란 평생의 고단한 삶에 허리가 굽은, 완벽한 노인을 뜻했다. 서툰 스페인어로 눈을 반짝이며 골목을 누비는 나를 보며 할머니가 아니라, 여전히 맨땅에 헤딩하며 세상을 탐험하는 청춘 그 자체로 받아들였다. 숫자가 지워진 땅, 지구 반대편에서 나는 얼떨결에 두 번째 청춘, 찬란한 인생의 회춘을 맛보고 있었다.

    수선 집 아줌마와 ‘깐부’가 되기까지

    물론 그 낭만적인 환호 뒤에는 날 것의 부딪힘이 있었다. 동네 공원 옆 수선 집에 옷을 맡겼다가, 나이가 엇비슷해 보이는 주인에게 제대로 한 방 먹었다. 옷 값보다 더 비싼 수선 비, 짐을 다시 싸서 나오려는 순간, 가격은 슬금슬금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중에서야 알았다. 그마저도 여전히 턱없이 비싼 값이었다는 걸.

    사실 내가 겪은 우아누코 사람들은 의외로 순박했다. 르완다처럼 Mzungu(외국인) 가격이 없다. 소란스럽고 복잡한 시장에 가더라도 시장에 형성된 가격 외에 부당하게 더 얹어 부르는 일은 없었고, 속았다는 씁쓸함이 남은 적도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팽팽하던 경계와 서운함은 시간이 흐르며 부딪히고 정이 들어, 결국 서로의 안부를 살뜰히 챙기는 동네 ‘깐부’가 되었다. “어리다고 얕본 것일까? 나이 어린 동생 같아서 그랬다”며 너스레를 떨던 그 주인은, 알고 보니 나보다 10살이나 어렸다. 그 해맑은 웃음 앞에 서면 뾰족했던 마음도 스르르 녹아내리곤 했다.

    시장 닭장수 아저씨가 건넨 “가장 신선한 닭”의 비밀

    시장에서 마주한 풍경은 또 다른 결의 충격이었다. 토요일마다 열리는 재래시장은 그날 가져온 물건이 그날 팔려나가기에 늘 신선하다. 냉장고 없는 이 길거리 시장에서는 농산물은 물론, 생선과 고기까지 고스란히 그렇게 유통된다.

    생 닭을 진열해 놓고 팔던 아저씨는 나이가 지긋해 보였지만, 알고 보니 그 역시 나보다 10살이나 어렸다. 늘 친절하던 그는 단골인 나를 누님보다는 굳이 친구(Amiga)여야 한다고 우기곤 했다. 어느 날, 이 닭이 괜찮냐고 물었다가, 나는 예상치 못한 광경 앞에서 숨을 멈추고 말았다. “신선한 닭을 주겠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고 기다렸다. 묶여 있던 살아있는 닭이 그 자리에서 목이 비틀리는 과정을 그대로 지켜보게 된 것이다. 남미 전통 시장만이 가진, 타협 없는 생명의 날 것 그대로의 풍경.

    따지고 보면 그야말로 지구상에서 가장 신선한 닭이 맞았지만, 그 충격은 꽤 오랫동안 가시지 않았다. 이방인으로 산다는 건, 이렇게 거친 문화의 속살을 예고 없이 통째로 삼켜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거친 길 위에서 익어간다는 것

    문득, 깊은 사유에 잠기게 된다. 같은 60세라도, 한국과 페루 고산 지대 주민들의 체감 연령과 신체적 노화의 정도는 크게 다르다. 한국의 60 대는 우수한 의료 시스템과 체계적인 관리, 실내 중심의 생활 덕분에 비교적 젊은 신체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페루 산 간 지방의 60 대는 치아 손실을 비롯해, 평생을 강한 고산 지대 햇빛과 고된 야외 노동 속에서 살아온 흔적이 얼굴의 깊은 주름으로 고스란히 드러난다.

    언뜻 훨씬 나이 들어 보일지 몰라도, 그 깊은 주름 하나하나는 고산지대의 가혹한 환경을 묵묵히 견뎌낸 억척스러운 삶의 훈장이다. 그리고 비단 페루 사람들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척박한 세월을 맨몸으로 버텨내며 우리를 키워내신, 우리 부모님 세대의 얼굴 역시 그러했다.

    바가지를 씌우던 이웃은 끝내 마음을 나누는 친구가 되었고, 눈을 질끈 감게 했던 시장의 충격적인 풍경마저 이제는 가슴 시린 일상의 소중한 조각이 되었다. 이방인으로서 거쳐야 할 모든 파란만장한 소소한 소동들을, 나는 이제 60대의 연륜과 따뜻한 유머로 품어 안는다.

    인생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다.

    이토록 뜨겁고 유쾌하게, 깊이 익어가는 것이다.

  • 페루 우아누코 GARU 유적지 여행 후기 – 현지 달의 축제 체험

    페루 우아누코 GARU 유적지 여행 후기 – 현지 달의 축제 체험

    투어를 떠나기까지

    여행을 하다 보면 가끔, 별생각 없이 클릭한 광고 하나가 하루 전체를 바꿔놓을 때가 있다. 나에게는 이번이 그랬다. 현지 친구가 툭 던지듯 알려준 문화체험 투어 광고. 그동안 지겹도록 긴 버스, 숨이 턱까지 차오르던 고지대 트레킹에 비하면 이번엔 꽤 편안한 여정일 것 같았다. 우아누코 주 안에서 유적도 보고, 현지인들의 달의 축제까지 직접 볼 수 있다니 — 부담 없이 마음이 먼저 가볍게 움직였다.

    동료 한 명과 함께 아르마스 광장에 모인 시각은 새벽 5시 30분. 아직 도시가 잠에서 덜 깬 서늘한 새벽 공기를 마시며, 우리는 새로운 하루를 시작했다. 아침, 점심, 입장료, 차량비까지 다 포함해서 109솔. 이 정도면 마음까지 홀가분해지는 기분 좋은 가격이었다.

    3,700미터, 가루 유적지에서

    도착해서 든든히 아침을 먹고 오른 곳은 해발 3,700미터, 가루(Garu) 유적지였다. 기원전부터 사람이 터를 잡고 살았다는 자리. 지금은 무너진 돌무더기와 흔적들만 덩그러니 남아 있지만, 그 앞에 서 있으니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지금 같은 현대적인 도구도, 기술도 없던 그 옛날에 선조들은 이 높은 곳에서 어떻게든 살아가는 법을 알고 있었다. 집을 짓고, 물을 구하고, 가족을 모아 살아가고, 심지어 죽은 이를 위한 자리까지 마당 한켠에 마련해두었다. 삶의 공간과 묘지가 나란히 놓여 있는 모습, 물을 길어 올렸을 우물터,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을 방의 흔적, 고된 삶 속에서 몸을 뉘었을 그 작은 공간들 — 그걸 하나하나 들여다보는데, 아득히 먼 세월을 건너온 선조들의 숨결이 이토록 또렷하게 다가왔다.

    유적을 걷는 발걸음도 좋았지만, 그 풍경을 더 빛나게 해준 건 따로 있었다. 새파란 하늘, 그 위에 떠 있던 새하얀 구름, 거대한 산줄기 아래서 국경을 넘어 함께 걷던 이들의 따뜻한 눈빛. 마침 초라스(Choras) 지역의 가루 달의 축제 시기와 겹쳐서 투어가 자연스럽게 꾸려진 것도, 지금 생각하면 참 다정한 운명의 장난 같았다.

    활기로 가득한 달의 축제 현장

    숨을 헐떡이며 유적 탐방을 마치고, 우리는 축제가 열리는 장소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은 아까의 적막함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화려한 만국기와 색색의 장식들이 바람에 신나게 펄럭이고, 주민들이 정성껏 차린 먹거리 장터가 구수하게 늘어서 있었다.

    거기서 만난 현지 학생들은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걸 알고는 환호하며 사진을 찍자고 졸랐다. 낯선 이방인을 향하던 그 맑고 풋풋한 웃음소리는, 시간이 꽤 지난 지금도 귀에 선하게 울린다.

    한낮의 뜨거운 햇빛 아래 슬슬 나른한 졸음이 밀려올 무렵 — 둥, 둥, 묵직한 북소리가 골짜기를 깨웠다. 풍년을 기리는 제단에 불이 지펴지고, 한 해의 농산물을 가득 담은 바구니를 든 여인들이 춤과 함께 등장했다.

    그 원초적이고 생생한 장면 하나만으로도, 이 먼 길을 떠나온 이유가 온전히 설명되는 것 같았다.

    하늘이 응답하던 순간

    그런데 참 신기한 일도 다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따갑게 내리쬐던 햇빛이 스르르 구름 속으로 숨더니, 마치 달이 그들의 기원에 금세 응답이라도 하듯 하늘이 순식간에 돌변했다. 우박이 굵게 떨어지더니, 곧이어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관광객들은 모두 흠뻑 젖은 채 허둥지둥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처마 밑에서 잠시 비를 피해보려 했지만 이미 온몸이 젖은 뒤였다. 그러다 누군가 먼저 웃음을 터뜨렸다.

    “그냥 이대로 내려가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빗속으로 걸음을 던졌다.

    골짜기를 내려오며

    붉은 황토물이 발목까지 차오른 골짜기를 헤치며 비를 맞고 내려오는 길. 매서운 추위에 몸이 덜덜 떨렸지만, 이상하게도 그 순간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리는 듯한 해방감이 밀려왔다.

    인생에 언제 또 이런 풍경 속에서 비를 맞으며 우아누코의 산을 내려와 보겠나 싶었다. 모든 걸 통제하려던 마음을 내려놓고, 그저 빗속에서 온전히 그 순간을 품어 안았던 하루. 흥미로우면서도 가슴 깊은 곳에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 그런 진정한 문화체험이었다.

  • 페루의 Campo에서 산다는 것 — 흙 먼지와 별빛 사이, 안데스의 푸른 숨결

    페루의 Campo에서 산다는 것 — 흙 먼지와 별빛 사이, 안데스의 푸른 숨결

    페루라고 하면 보통 사람들은 마추픽추나 아름다운 남미의 휴양지들을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내가 삶을 꾸려가고 있는 곳은 ‘Campo(캄뽀)’, 스페인어로 ‘시골’을 뜻하는 곳이다.

    ‘정겹고, 평화로운’ 느낌을 주는 단어이지만, 사실 처음부터 내가 사는 우아누코(Huánuco)가 시골이라고 생각하진 못했다. 적어도 페루의 다른 큰 도시들을 직접 가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시골이다 보니 한국처럼 소소한 문화생활을 즐길 만한 곳도 마땅치 않다.

    그리고 처음 이곳에 적응하던 시기에는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해 참 많이 애를 먹었다. 주변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밤늦도록 창문이 흔들릴 만큼 시끄럽게 음악을 틀어놓고 춤추며 파티를 즐기는 이곳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당황스러웠기 때문이다.

    아침 산책길도 쉽지 않았다.

    길거리에 개들이 너무 많아 마음 놓고 걸어 다니며 운동을 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서야 KOICA 봉사단 남미 파견자들에게 왜 광견병 예방접종이 필수였는지 비로소 이해가 갔다.

    길가에 높이 설치되어 있는 쓰레기통의 비밀도 알게 되었다. 높게 만들지 않으면 동네 개들과 고양이들이 온통 쓰레기 봉투를 헤집어 놓기 때문이었다.

    낮이면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흙먼지가 그대로 입안으로 들어온다. 깜빡하고 마스크를 쓰지 않고 나선 날에는 온종일 입안에서 서걱서걱 모래가 씹히곤 한다.

    깨끗하고 질서 정연한 한국의 도시, 철저한 쓰레기 분리수거와 공중도덕에 익숙했던 나에게 이곳의 일상은 매 순간이 낯선 도전이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이 흙먼지 뒤에는 전혀 다른 세상이 숨어 있었다.

    낮 동안의 수고로움을 씻어주듯 펼쳐지는 하늘은 놀라울 정도로 청명하다. 눈이 부시도록 파란 하늘, 손에 잡힐 듯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하얀 구름, 그리고 밤이 되면 하늘 가득 보석처럼 박히는 별빛. 그 별빛을 올려다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멀리 있는 고국을 떠올리게 된다.

    참 의외였던 것은,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따뜻함이었다.

    작은 시골 마을인 우아누코에서 한국인을 이렇게 반갑게 맞아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K-POP, K-드라마와 한국 음식의 인기는 이곳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길을 걷다 보면 현지인들에게 사진을 같이 찍자는 부탁을 받을 때가 있다. 그들은 나와 함께 찍은 사진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하기도 한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희고 깨끗한 피부 때문이었는지 신기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사람들이, 이제는 친근하게 다가와 나에게 길을 묻는다.

    이곳의 강렬한 햇빛 아래 피부가 조금씩 그을린 탓에, 이제는 나를 자기들과 똑같은 현지인으로 착각하는 모양이다.

    나 역시 그 오해가 싫지 않다. 그만큼 내가 이 땅과 사람들 속으로 조금씩 스며들고 있다는 뜻일 테니까.

    토요일이 되면 일주일 동안 먹을 양식을 준비하는 즐거운 일상이 시작된다.

    지역 농부들이 직접 재배한 싱싱한 농산물을 가져와 저렴하게 파는 토요 장터, ‘라 페리아 쿨투랄(La Feria Cultural)’이 열리는 날이다.

    왁자지껄한 장터에 들어서면 어릴 적 고향에서 보았던 정겨운 5일 장의 풍경이 겹쳐 보인다.

    “외국인이 이런 것도 먹을 줄 알아?” 신기해하는 상인들은 무심한 듯 정이 담긴 덤을 툭툭 얹어준다. 덤으로 받아 든 야채 한 더미에서 만국 공통의 따뜻한 시골 인심을 느낀다. 괜스레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불편함과 눈부심이, 낯섦과 정겨움이 오가는 이곳.

    나는 오늘도 페루의 Campo, 우아누코에서 살아가고 있다.

    나의 모습도 조금씩 더 이 땅과 사람들을 닮아가고 있다.

  • 낯선 땅 — 은퇴 후 다시 낯선 나라에 살다

    낯선 땅 — 은퇴 후 다시 낯선 나라에 살다

    은퇴하고 나서야 알았다.

    직장을 떠나는 순간,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사회에서 잊힐 수 있다는 것을.

    직장에 있을 때는 해야 할 일이 분명했고,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가진 경험과 판단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고,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더 이상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자유로웠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도 있었고, 시간도 많아졌다.

    하지만 그저 편안함에 안주하며 남은 삶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이제 어디에서 쓰임 받을 수 있을까?’

    다시 한번 내가 필요한 곳에서, 보람을 느끼며 살아보고 싶었다.

    그래서 KOICA(코이카) 해외 봉사단에 지원했다.

    그 선택이 내 인생의 후반전을 이렇게 바꾸어 놓을 줄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렇게 낯선 나라에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뜻밖의 사실을 깨달았다.

    한국에서는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나의 경험들이, 이곳에서는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귀한 자산이 되었다는 것을.

    내가 살아오며 배운 것들, 일터에서 쌓은 노하우, 사람들과 부딪치며 얻은 지혜.

    그저, 지나간 세월이라 여겼던 것들이 낯선 땅에서는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진 경험이 필요한 곳을 그동안 아직 만나지 못했을 뿐이었구나.”

    낯선 땅의 풍경은 어딘가 익숙했다. 이곳 사람들의 삶이 내가 어릴 적 살아온 시대의 모습과 참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의 나 역시 가난하거나 불편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더 나은 세상을 경험해보지 못했으니까.

    그때 자연스럽게 몸에 밴 것들이 지금 이 낯선 땅에서 살아가는 나를 버티게 하는 단단한 힘이 되어 주었다.

    참 이상한 일이다.

    지나온 삶이 모두 잊힌 줄 알았는데, 도리어 그 경험들이 나를 다시 살아가게 하고 있다.

    르완다에서 살았고, 아프리카 여러 나라를 여행했다. 그리고 지금은 페루의 정겨운 Campo(시골마을)인 우아누코(Huánuco)에서 살아가고 있다.

    또다시 낯선 언어와 낯선 이들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런데 이제는 예전처럼 낯섦이 두렵지 않다.

    이 땅에서 내가 누구인지 다시 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생의 2막은 지금까지의 삶을 내려놓고 새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온 삶이 가진 진정한 의미를 다시 발견해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살아본다.

    낯선 땅에서.

    다시, 나답게.

  • 다시 르완다로 — 우유 한 봉지에 담긴 생명의 무게, 그리고 삶의 절박함

    다시 르완다로 — 우유 한 봉지에 담긴 생명의 무게, 그리고 삶의 절박함

    르완다의 붉은 땅, 가슴 아린 삶의 조각들

    코로나라는 거센 풍랑 속에서, 마치 전쟁터 같던 키갈리 공항을 떠나온 지 2년 5개월. 팬데믹의 긴 터널을 지나 내가 다시 도착한 르완다의 수도 키갈리는 예전과 달랐다. 맑고 청명했던 하늘은 자욱한 공해로 흐려져 있었고, 길거리를 가득 메운 모토택시들은 거친 경적을 울리며 숨 가쁘게 도로를 메우고 있었다.

    지원받은 주거비에 맞춰 어렵게 구한 집은 바퀴벌레의 온상이었고, 매일 아침이면 벽을 타고 오르내리는 도마뱀이 낯선 이방인을 반겼다. 익숙함은 사라지고, 더욱 험난해진 현실이 나를 먼저 맞이했다.

    내가 배치된 곳은 레메라 보건소, 이곳은 가난과 질병의 그늘이 가장 짙게 드리워진 곳이었다. 매일 보건소 마당에는 끝도 없이 길게 늘어선 사람들의 줄이 이어졌다.

    이름만 입력하면 모든 정보가 나오는 한국의 전산시스템과 달리, 수많은 종이 파일 속에서 일일이 환자 카드를 찾고 손으로 기록을 남겨야 했다.

    보건소를 찾는 환자들의 대부분은 AIDS 환자들이었다. 병의 경중에 따라 30일 또는 60일에 한 번씩 약을 받으러 찾아왔다. 놀랍게도 그들은 자신의 질병을 담담하게, 때로는 밝은 표정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밝은 얼굴 뒤에는 늘 서늘한 두려움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면역력이 떨어진 그들에게 폐질환 같은 합병증이 찾아오는 날은 곧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평소 유쾌하게 인사를 건네던 30대의 한 환자가, 그날따라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한 채 서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내 가슴은 덜컥 내려앉았다.

    나의 주요 직무는 영양실조 파트였다. AIDS 가정과 영양실조 아동들을 발굴하고, 일주일에 한 번 우유나 영양식을 나눠주는 일이었다.

    그러나 따뜻한 시선만으로는 품어내기 힘든, 가슴 시린 현실의 벽에 부딪히는 날들이 많았다. 기부로 들어오는 우유는 유통기한이 없었기에, 부정 유통을 막기 위해 우리는 지난주에 나눠준 빈 우유 봉투를 일일이 회수하여 확인했다. 이를 저렴하게 재래시장에 파는 이들이 있었고, 어떤 이들은 봉투 수량을 채우려 길거리에 버려진 더러운 빈 봉투를 주워 오기도 했다.

    어느 날, 영양식이 전면 중단될 위기에 처했던 20대의 어린 엄마, 나는 보건소 한쪽 구석에서 어깨를 들썩인 채 울고 있던 그 엄마를 마주했다. 붉어진 눈시울로 그녀의 손을 잡고 물었을 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나를 깊은 충격에 빠뜨렸다.

    “우유는 내 아이 한 명의 배를 채우지만, 그 우유를 팔아 감자를 사면 우리 온 가족이 굶지 않고 며칠을 버틸 수 있어요…”

    우리가 생각했던 ‘영양’과 그들이 살아내는 ‘생존’의 기준은 너무나 달랐다. 한국에서 챙겨온 여분의 옷을 건네주어도 그들은 입지 않고 시장에 나가 팔았다. 당장의 하루를 살아내야 하는 그들에게 옷과 우유는 단순한 생활용품이 아닌, 가족의 생계를 잇는 유일한 화폐였던 것이다. 비난할 수도, 탓할 수도 없는 그들의 일상이 내 마음에 묵직한 돌덩이 하나를 얹어놓았다.

    그렇게 그들의 삶 속으로 깊숙이 들어간 지 1년. 나는 지역주민들의 기초 보건의료체계를 바꾸는 현장사업에 착수했다. 모성 사망률을 낮추기 위한 의료장비를 도입하고, 땔감 연기와 강렬한 태양 때문에 눈이 상한 주민들을 위해 안과 장비를 갖추었다.

    무엇보다 환자들이 뙤약볕 아래서 무한정 기다려야 했던 그 길고 길었던 줄을 줄여주기 위해, 접수부터 결제까지 이어지는 온라인 전산 환경을 구축했다.

    새로운 방식을 받아들이는 것조차 쉽지 않았던 현지 직원들 사이에서, 아들처럼 영리하고 유능한 젊은 보건소장이 큰 힘이 되어주었다. 그가 없었다면 결코 해내지 못했을 일이다.

    악명 높은 ‘르완다 타임’을 극복하고 마침내 첫 온라인 전산 접수가 이루어지던 날, 보건소 앞마당의 줄은 눈에 띄게 줄어들어 있었다.

    돌아보면 그 낯선 땅에서 내가 건넨 것은 한 팩의 우유와 새로운 장비였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나에게 건넨 것은 삶의 절박함과 그 안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생명의 무게였다.

    떠나보니 비로소 보이는 것들. 르완다의 붉은 땅에서, 나는 오늘도 그 소중하고 아린 삶의 조각들을 하나씩 가슴에 담아 기록한다.

  • 르완다 청각장애 학교 이야기 — 아이들의 눈빛 속에 마음을 두고 오다

    르완다 청각장애 학교 이야기 — 아이들의 눈빛 속에 마음을 두고 오다

    내가 파견된 곳은 르완다 각지에서 청각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모여드는 기숙 학교였다.

    이곳은 나이와 학년이 따로 놀곤 하는 묘한 곳이었다. 가정 형편에 따라 일곱 살 어린 나이에 부모와 떨어져 입학한 1학년 아이가 있는가 하면, 같은 반에 열네 살 큰 형이 함께 앉아 있기도 했다. 엄마가 보고 싶어 눈물이 차올라도, 옆에 있는 형의 눈길에 울음조차 제대로 뱉어내지 못하던 어린아이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 아이들은 각자 침대 매트와 양동이 하나씩을 들고 학교로 들어온다. 그 양동이는 아이들이 씻을 때 사용하는 소박한 일상의 도구이자 전부였다.

    입학과 동시에 아이들은 수화를 배운다. 처음에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으니 선생님들은 칠판에 그림을 그려가며 뜻을 전하지만, 신기하게도 학년이 올라갈수록 아이들은 자유롭게 수화로 소통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참 마음이 아팠던 것은, 공부를 더 하고 싶어도 르완다에는 수화로 교육받을 수 있는 상급학교가 없다는 현실이었다.

    그래서 5~6학년이 되면 아이들은 목공반, 미싱반, 미용반 등에 들어가 사회로 나갈 준비를 한다. 장애와 가난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기 힘든 삶이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아프리카는 일 년 내내 무덥기만 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르완다는 연중 우리나라의 초가을 같은 날씨가 계속된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엄청난 추위를 느낀다. 따뜻한 방과 두툼한 이불이 익숙한 우리와 달리, 차가운 맨땅에 거적때기 하나 깔고 잠에서 깨어나는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인데도 두꺼운 패딩을 입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결코 낯선 풍경이 아니다. 그나마 불을 피울 형편이 되는 집 아이들은 아침에 따뜻한 포리지(죽) 한 잔을 마시며 추위를 견뎌낸다.

    쉬는 시간이 되면 아이들은 학교 처마 밑으로 오밀조밀 모여든다. 비를 피하는 곳이자, 햇볕을 모아 몸을 녹이는 따스한 쉼터이기 때문이다. 축구공 하나 없어 바나나 잎을 동그랗게 뭉쳐 만든 공을 차며 놀던 아이들. 나는 그 아이들을 위해 스포츠 용품을 지원하고, 보건실을 운영하며 위생 및 보건 교육을 시작했다.

    다쳐서 피를 흘려도 병원비 부담 때문에 치료는 엄두도 내지 못하던 아이들이었다. 진통제와 비상 구급약품을 구비해 두고 다친 아이들의 상처를 치료해 주는 것이 나의 중요한 일상이 되었다.

    더 나아가 아이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싶어 ‘현장사업’을 추진했다. 아이들의 장애가 선천적인지, 후천적인지를 구별할 수 있는 검사실을 구축하는 사업이었다. 선천적이라면 수화를 통한 맞춤형 교육을 하고, 후천적이라면 보청기 착용이나 재활 치료를 통해 소리를 찾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싶었다. 다행히 사업 승인을 받았고, 이제 막 착수금이 들어오려던 바로 그 찰나, Covid-19라는 거대한 재앙이 전 세계를 덮치고 말았다.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다. 르완다 정부는 첫 확진자가 나온 다음 날, 전국의 모든 학교에 폐쇄령을 내렸다. 그렇게 나는 아이들과 마지막 작별 인사조차 나누지 못한 채 쫓기듯 귀국길에 올라야 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학교 교장 선생님에게서 메일이 도착했다.

    “너는 봉사자 이상이었고, 이 아이들의 엄마였다.”

    메일을 읽는 순간 참았던 눈물이 왈칵 터져 나왔다.

    지금도 그 아이들이 사무치게 그립다. 검은 얼굴 위로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빛나던, 그토록 예쁜 아이들의 얼굴이 보고 싶다.

    사실 그곳의 삶이 늘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방학이 끝나고 돌아오는 여학생들 중에는 이웃집 어른들에게 성폭행을 당해 임신한 채 돌아오는 가슴 아픈 일들도 있었다.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든 비극이었지만, 아이들은 그 아픔마저 삶으로 품어내며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웃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난과 상처 속에서 맑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아이들을 보며 나는 수없이 많은 것을 배웠다. 내가 도우러 갔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초롱초롱하게 살아있는 아이들의 눈빛과 순수한 미소 속에서 지친 내 마음이 치유되고 가슴이 다시 뛰는 것을 느꼈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손짓과 눈빛으로 아이들과 충분히 소통할 수 있었다. 낯선 땅의 언어는 머리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배운다는 것을 그때 깊이 깨달았다.

    나는 도우러 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아이들의 살아있는 눈빛을 보고 사랑을 받으며, 삶의 진정한 의미를 배웠다.

    처마 밑에서 따스한 햇살을 쬐며 나를 향해 해맑게 웃어주던 그 예쁜 눈빛들이 오늘따라 더욱 그리워진다.

  • 내가 다시 낯선 나라로 떠난 이유 — 얼떨결에 시작된 인생 2막의 서막

    내가 다시 낯선 나라로 떠난 이유 — 얼떨결에 시작된 인생 2막의 서막

    남들보다 조금 일찍 은퇴를 결정했던 건, 내 인생의 두 번째 막을 한시라도 빨리 열어보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만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평소 소심한 성격이었던 나에게 ‘해외봉사’란 두려움 그 자체였다.

    어느 날, 세상 물정에 밝고 뭐든 똑부러지던 친구가 KOICA(코이카) 봉사단 이야기를 꺼내며 나를 설명회장으로 데리고 갔다. 설명회를 듣고 나오는 길,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외국어 한마디 제대로 못 하는 내가 어떻게 저렇게 거창하고 큰일을 할 수 있을까. 늘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친구에 비해 나는 겁부터 났다.

    그래도 용기를 내어 서류를 제출했다. 어찌어찌 1차 서류 합격, 2차 면접 합격까지 지나갔는데 최종 건강검진에서 ‘재검’ 통보를 받았다. 과거 수술 이력이 있었던 터라 덜컥 자신감을 잃었다. ‘그럼 그렇지. 그저 내 건강 상태를 점검해 본 귀한 기회로 삼자’ 하며 마음을 비웠다. 사실 누구에게나 흔히 나올 수 있는 검사 결과였지만, 큰 기대를 하지 않으려 애써 마음을 다독였던 것 같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최종 선발 통보를 받았다. 정작 나를 이 길로 이끌어주고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친구는 1차에서 떨어지고, 얼떨결에 나만 혼자 남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눈앞이 아득해졌다. 당장 언어가 걱정되어 부랴부랴 벼락치기를 해보았지만, 평생 안 되던 외국어가 벼락치기로 될 리 만무했다. 게다가 국내 교육장에서 만난 예비단원들은 그야말로 우리나라의 엘리트들만 모아놓은 것 같았다. 쉰을 넘긴 나이에 그 뛰어난 젊은이들 사이에 있으니 스스로가 한없이 작게 느껴졌다.

    그렇게 추위가 매섭던 2018년 겨울, 성탄절을 딱 일주일 앞두고 르완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공항에서 가족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데, 슬픔보다는 ‘내가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긴장감이 온몸을 짓눌렀다.

    24시간이 넘는 비행 끝에 도착한 르완다의 공항은 마치 한국의 작은 간이역 같았다. TV 구호 방송에서 보던 열악한 풍경이 펼쳐질 줄 알았는데, 의외로 아프리카의 모범국가답게 깨끗하고 차분한 도시의 첫인상이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진짜 현장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임시숙소에 여장을 풀자마자 빡빡한 현지적응 훈련이 시작되었다. 현지 안전 수칙부터 생소한 ‘키냐르완다어’ 교육까지 진행되는데, 익숙지 않은 영어조차 잘 들리지 않는 마당에 전혀 모르는 현지어가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훈련이 끝난 후, 동기들은 각자의 파견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내가 파견된 곳은 청각장애인 학교였다.

    현지어에 적응하기도 전에, 이곳에서는 ‘수화’라는 또 하나의 새로운 언어를 배워야만 했다. 돌이켜보면 파견 초기 나의 하루는 온통 ‘공부’ 또 ‘공부’뿐이었다. 눈을 뜨면 마주치는 온통 낯선 검은 피부의 사람들, 그리고 통하지 않는 언어 속에서 외로운 적응기를 버텨냈다.

    하지만 이론만으로는 현장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었다. 부딪치고 깨어지며 나는 비로소 봉사의 참 의미를 배워가기 시작했다.

    낯선 땅의 언어와 문화는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품어야 한다는 유연성을 배웠고, 없으면 없는 대로, 있는 것에 만족하고 자족하는 법을 터득했다. 내 조바심을 내려놓고 현지인들의 눈높이와 속도에 맞춰 걸어가는 내려놓음의 여유를 알게 되었으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뜻밖의 순간에 빛을 발하는 나만의 창의력을 발견하기도 했다.

    파견 6개월 차, 활동 평가회에서 오랜만에 동기들을 다시 만났다. 헤어진 가족을 만난 것보다 더 가슴이 벅차올랐다. 무엇보다 내 나라 말인 ‘한국어’로 마음껏 수다를 떨 수 있다는 사실이 눈물겹게 감사했다. 그런데 단어가 금세 떠오르지 않아 버벅거리는 나를 보며 ‘이제는 0개 국어가 되어가는구나’ 싶어 피식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국내 교육장에서 그렇게 유능해 보였던 엘리트 동기들도 현지적응에 애를 먹으며 저마다의 애환을 털어놓고 있었다. 속으로 가만히 생각했다. ‘어라, 다들 이렇게 힘들어하는데… 의외로 나만 잘 버티고 있는 건가?’ 소심했던 내가 뜻밖의 단단함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적응을 마치고 활동을 1년 더 연장하여 르완다에서 살아간 지 15개월째 되던 해, 전혀 예상치 못한 불청객인 Covid-19(코로나19)가 전 세계를 덮쳤다. 국경이 닫히고, 마치 전쟁터 같았던 키갈리 국제공항의 인산인해를 뚫고 특별기편으로 급히 귀국길에 올랐다.

    긴 긴장감 끝에 무사히 도착한 한국의 인천공항. 화장실에 들렀다가 따뜻한 비데가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고였다.

    ‘아, 내 나라 대한민국… 참 장하다.’

    겁 많고 소심했던 쉰 넘어의 도전. 르완다에서의 15개월은 그렇게 강렬하고 뜨거운 기억을 남긴 채, 내 인생 2막의 잊지 못할 첫 장으로 기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