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Yesook Jin

  • 바람의 딸을 꿈꾸던 소녀, 60에 낯선 땅에 서다

    바람의 딸을 꿈꾸던 소녀, 60에 낯선 땅에 서다

    평범함이라는 가장 강력한 무기

    가슴 한구석에 꼬깃꼬깃 접어두었던 지도 한 장이 있었다. 젊은 날, 나의 청춘은 뜨거웠고 마음 한편은 늘 세상을 향한 발걸음을 갈망했다. 당대 청년들의 마음을 흔들었던 종군 기자 이진숙의 기록과 ‘바람의 딸’ 한비야의 책장을 넘길 때마다 가슴이 뛰었다. ‘언젠가는 나도 저 너머의 세계로 떠나게 될 거야.’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품었던 그 꿈은 그러나, 일상이라는 거대한 현실과 치열한 직장생활의 무게에 밀려 서서히 묻혀갔다.

    오랜 세월이 흘러 은퇴라는 이름표를 달았을 때, 잊고 살았던 그 불씨가 불쑥 고개를 들었다. 첫 번째 낯선 땅이었던 르완다에서 온몸으로 부딪히며 모든 소명을 다 쏟아부었다고 생각했다. 한국으로 돌아와 익숙한 삶의 평온한 울타리 안에서 여유를 누릴 줄 알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마음 깊은 곳의 불씨는 죽은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 깊은 곳에서 또다시 떠나고 싶다는 뜨거운 충동이 솟구쳤다. 일상의 안일함이 길게 이어질수록, 오히려 내 안의 세포들은 더 거칠고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던 그 대지를 그리웠다. 르완다에서의 경험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의 서막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다시 짐을 꾸렸다. 이번에는 아프리카가 아니었다. 남미였다. 지구 반대편의 거친 대지, 페루였다.

    그렇게 인생 2막의 두 번째 낯선 땅이 시작되었다. 처음 페루 안데스의 정기가 흐르는 우아누코 땅에 발을 디뎠을 때의 공기를 기억한다.

    영어가 거의 통하지 않는 곳.

    온통 스페인어뿐인 그 거대한 대지 위에서 내가 아는 단어라곤 기초적인 몇 마디가 전부였다. ‘소통이 안 되는 이 낯선 도시에서, 과연 내가 살아갈 수 있을까?’ 막막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사방이 산맥으로 둘러싸인 낯선 대지 앞에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자괴감이 밀려들었다. 현지에 도착해 마주한 세계는 너무나 넓고 찬란했다. 그 찬란한 국제적인 환경 속에서 홀로 빛을 잃은 듯 작아진 나를 발견했다.

    ‘나는 그동안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았구나. 왜 더 일찍 이 넓은 세상으로 떠나오지 못했을까.’ 그저 평범하게 살아왔던 삶이 후회스러웠다.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만 같아 작아지고 초조해지는 날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 절망의 바닥을 지나면서, 뜻밖의 깨달음이 찾아왔다. 시간이 흐르고 흙먼지 날리는 우아누코의 일상에 스며들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통째로 뒤집히기 시작했다. 가난을 느끼는 기준이 변했다.

    화려한 편의와 많은 소유가 없어도, 가진 것 안에서 스스로 밥을 지어 먹고 안데스의 거친 고원의 산세를 두 발로 묵묵히 걷는 일상만으로도 삶은 꽤 괜찮게 흘러갔다.

    내 손으로 하루를 꾸려가는 충만함이 차올랐다.

    그때 비로소 뼈저리게 깨달았다. ‘내 삶의 질은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구나.’

    이 단단한 생각의 뼈대가 세워지자 신기하게도 외부의 시선이나 결핍감은 더 이상 나를 흔들지 못했다. 물론 언젠가 한국으로 돌아가면, 세상은 여전히 그들만의 속도와 잣대로 나를 평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관없다. 이 낯선 땅에서 온몸으로 부딪히며 얻어낸 생존 감각은, 세상을 더 깊고 넓게 품을 수 있는 가장 귀한 자양분이 되었으니까.

    문득 이런 생각이 스친다. 지구 반대편의 낯선 도시 한복판, 혹은 무인도에 툭 던져진다 해도, 이제 나에게는 나만의 방식으로 일상을 재건할 가장 강력한 무기가 생겼다. 거창한 무언가가 아니라, 스스로 살아내는 이 단단한 내면 말이다.

    그리고, 세상의 풍파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나를 지탱해 주는 힘이 바로 그 평범함에 있다는 것을 이 거친 대지에서 배웠다. ‘평범하게 산다는 게 가장 어렵다’던 어른들의 그 깊은 뜻을, 비로소 지구 반대편의 흙먼지 속에서 온몸으로 통과해 낸다.

    두 번째 낯선 땅, 페루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오늘도 나는 그 평범하고도 단단한 온기와 나다운 속도로 살아내고 있다.

  • “Corea!” 말을 잃어버린 자리에서 만난 온기

    “Corea!” 말을 잃어버린 자리에서 만난 온기

    말이 통하지 않는 땅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어지간한 정신 체력으로는 버티기 어려운 일이다. 세계를 떠돌다 보면 ‘0개 국어가 된다’는 농담 같은 진실을 매 순간 마주하게 된다. 영어가 온전하지 못한 상황에서 르완다의 키냐르완다어를 거쳐 페루의 스페인어까지 부딪히다 보니, 이제는 외국어는커녕 모국어인 한국어마저 혀끝에서 맴돌다 툭툭 끊기기 일쑤다.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는데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해 머뭇거리고 있으면, 도리어 현지인들이 먼저 내 마음을 읽고 다가와 묻고 대답해 준다. 그 다정한 눈빛과 서툰 배려야말로 언어를 뛰어넘는 가장 뜨거운 마음의 언어가 아닐까.

    며칠 전, 우아누코 각 지역에서 모인 특산물 홍보 축제가 열렸다. 우리 사무소도 부스를 마련해 국제부의 활동을 알리고 있었다.

    우아누코의 질 좋은 커피를 세계로 수출하고, 장학제도를 연결하는 소중한 일들을 소개하는 자리였다.

    축제의 열기가 무르익어 갈 무렵, 생각지도 못한 일격이 날아들었다. MC는 당연히 외국인인 나도 현지 언어를 구사할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무대 위를 휘젓던 MC가 갑자기 Extrangera 인 나를 불쑥 호명했다. 엉겹결에 마이크를 건네받은 것이다.

    도대체 내게 이런 순서가 돌아올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겨우 내 소개까지는 마쳤는데, 당황한 나머지 그나마 머릿속에 남아 있던 스페인어 단어들은 궤도를 잃은 채 사정없이 흩어져 버렸다. 다음 문장을 어떻게 이어야 할지 아득한 공백이 밀려온 순간,

    ‘내 나라 말이 있잖아’.

    이 빛나는 지혜로 결국 내 생의 가장 깊은 언어인 한국어로 입을 떼기 시작했다.

    “…….”

    순간 객석에서 뜻밖의 환호가 터져 나왔다.

    “Corea! 코레아!”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이내 흥겨운 박수 소리가 축제장을 채웠다.

    아찔했던 위기의 순간은 그렇게 믿기 힘든 온기로 채워졌다. 그들의 따뜻한 시선과 격려 속에서, 문득 ‘내가 참 멀리도 와서, 이렇게 한국을 알리고 있구나’ 하는 뭉클한 자부심이 밀려왔다. 그동안 낯선 언어와 환경에 눌려 한없이 위축되어 있던 마음의 평정이 비로소 단단하게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언어가 유창해서 이 거친 대지를 살아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서툴고 부족했기에, 그들이 먼저 손을 내밀어 마음을 모아 도와주었던 것이다. 그렇게 좌충우돌 부딪히며 살아내다 보니, 어느새 까마득하던 이 낯선 도시의 하루가 고스란히 내 삶이 되어 스며들어 있다.

    오늘도 나는 그들의 다정한 온기 속에서 하루를 배우고, 말 대신 마음으로 건네는 삶의 지혜를 선물 받는다. 날마다 깊어지는 일상이다.

  •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Campo의 친구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Campo의 친구들

    지구 반대편, 모든 것이 낯설고 숨이 턱 막히던 우아누코의 첫날을 기억한다.

    편안하고 익숙했던 한국의 삶을 기꺼이 뒤로하고 이 먼 땅에 발을 디뎠을 때, 문득 가슴 한구석에서 치밀어 오르던 서글픔을 숨길 수가 없었다. ‘내가 대체 무엇을 위해 이 고생을 자처한 거지?’ 휑한 방안에 홀로 남겨졌을 때 밀려오던 그 막막함이란. 언어도, 공기도, 눈에 닿는 모든 풍경도 칼날처럼 낯설기만 하던 캄포의 일상 속에서 나는 위태로운 이방인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차갑고 거친 벽을 가장 먼저 맨손으로 허물어준 이들이 있었다.

    한국을 향한 순수한 애정으로 뭉친 모임, ‘페코바라기’.

    알고 보니 그들은 이 작은 도시 우아누코에서 각자의 자리와 기반을 갖추고 안정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나를 대할 때는 그 어떤 특권의식도, 거리감도 없었다. OJT 시절 둥지를 틀 집을 구하는 발걸음부터, 재래시장의 구석구석, 생필품을 파는 가게, 은행 업무, 그리고 낯선 지명과 모토 택시의 기본요금 하나까지. 처음 온 이방인이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지, 그들은 살림을 가르치듯 내 손을 잡고 세상의 길을 열어주었다.

    그것은 단순한 호의가 아니었다. 낯선 땅에서 혼자 버티며 숨죽일 나를 향한 가장 따뜻한 구원이었다.

    해외에 오래 살수록 느끼는 건, “저는 혼자서도 잘해요”가 결코 자랑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힘들 때 전화할 사람, 같이 밥 먹을 사람, 이유 없이 만날 사람이 있는 것도 삶을 잘 꾸려나가는 능력이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삶의 질을 결정하는 건 결국 ‘오늘 저녁 같이 먹을래요?’라고 편하게 연락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해외 생활에서 인간관계는 단순한 옵션이 아니라 삶을 지탱하는 인프라이다. 잘 산다는 건 혼자서 뭐든 악착같이 해내는 게 아니라, 어디에 살든 내 사람들과 연결되어 사는 것 같다. 사람과 연결되어 살아가는 것이 결국 나를 건강하게 살아가게 하는 힘인지도 모른다.

    한국인이라고 해서 꼭 한국인하고 만 어울릴 필요도 없다. 한인 커뮤니티도 물론 소중하지만 그곳에만 머물면 내가 사는 세상은 생각보다 좁아진다. 현지 친구, 다른 나라에서 온 친구, 나와는 전혀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어우러지는 것.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해외에 산다는 것의 가장 큰 특권이 아닐까.

    그 특권을, 나는 ‘페코바라기’ 친구들과 함께 누리고 있었다.

    그 다정한 인연은 얕은 동정에 머물지 않았다. 그들은 나라는 사람, 그리고 한국이라는 나라와의 관계를 진심으로 깊이 있게 이어가고 싶어 했다.

    그들은 내가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재료를 미리 준비해 두고, 마치 한국음식 강사를 초청하듯 나를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불러주었다. 함께 만들고 체험하는 자리였다.

    루루의 집에서 함께 빚던 송편과 떡국, 북적거리던 식당에서 웃음꽃을 피우며 맛보던 김밥과 떡볶이, 플로르의 집안 가득 고소하게 퍼지던 잡채 냄새까지.

    몇 차례에 걸쳐 이어진 그 맛의 향연 속에서, 그들이 보여준 반응은 “어머, 맛이 너무 환상적이에요!”라며 감탄을 터뜨렸다. 함께 음식을 만들고 서툴게 빚은 모양을 보며 박수를 치며 웃던 그 시간들 속에서 우리는 이미 국경을 넘어 진짜 친구가 되어 있었다.

    한식에서 끝이 아니었다. 우리는 한복의 고운 자락이 담긴 ‘노리개’를 함께 만드는 작업에도 도전했다.

    한 땀 한 땀 손끝에 정성을 모아 노리개를 빚어냈고,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직접 행사 부스를 열어 우아누코 사람들에게 우리 문화를 알리고 판매하는 즐거움까지 누렸다.

    행사가 끝날 때마다 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다음에 또 해주세요!”라고 외치던 그들의 목소리는, 지친 내게 일상을 버텨낼 가장 찬란한 연료였다.

    이제 우아누코의 거리를 걷다 우연히 그들을 마주치면, 마치 고향의 다정한 옆집 아줌마를 만난 것처럼 가슴속에서부터 뭉클한 반가움이 왈칵 차오른다. 어디에서 어떤 축제가 있는지 소식을 먼저 전하고 안부를 묻는 그들의 마음을 보며, 나는 깨닫는다.

    내가 이 낯선 땅에 스스로 뿌리를 내린 것이 아니었다.

    그 사람들이, 그 따뜻한 온기가 나를 이곳에 기꺼이 살아가게 붙들어 매어 준 것이었다.

    모든 것이 두렵고 불편하기만 했던 캄포의 하루하루. 그러나 이제 그 시간들은 날카로운 상처가 아니라, 내 삶에서 가장 깊고 찬란한 무늬가 되었다. 그리고 그 무늬의 결마다, 지구 반대편에서 건너와 내 생의 가장 소중한 인연이 된 이들의 따뜻한 얼굴이 새겨져 있다.

  • 지구 반대편에 울려 퍼진 애국가, 그곳에 남겨진 숨결

    지구 반대편에 울려 퍼진 애국가, 그곳에 남겨진 숨결

    지구 반대편 낯선 고산 도시 한복판에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 나의 작은 성취와 헌신으로 이 Campo 우아누코에 내 나라의 애국가를 부르는 순간 시야가 흐려졌다. 해외에 나가봐야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증명되는 셈이다. 그동안 겪었던 온갖 서러움과 땀방울이 주마등처럼 스치며 나도 모르게 가슴이 벅차고 뜨거워졌다.

    맘 졸이며 준비했던 프로젝트의 개소식(기증식) 날이다. 코이카 소장님도 오셨고 단원들도 모두 참석해주었다. 그리고 우아누코주의 주지사가 자리를 빛내주었다. 주지사의 스케줄에 따라 프로그램은 이리저리 밀리고 조금은 엉망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행사는 성공이었다.

    하지만 이 벅찬 환희에 이르기까지, 처음 마주했던 우아누코의 CEBE 특수교육센터는 막막함 그 자체였다. 빗물이 새고 태양을 제대로 피할 수 없는 낡은 처마 밑. 버려진 박스를 주워다 교구를 만들며 아이들을 품어내던 선생님들의 지친 손길.

    아무런 장비도 없는 열악한 환경에 놓인 교실을 바라보며 나는 끊임없이 물었다. “이 아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게 뭘까?”

    아프리카 르완다의 붉은 먼지 속에서 ‘다시는 현장사업에 삶을 매이지 않으리라’ 다짐했건만, 뻔히 보이는 예산과 눈에 밟히는 아이들의 필요 앞에서 결국 그 다짐은 무너지고 말았다. 내가 조금 더 고단하고 땀 흘리면 누군가의 삶에 선한 영향력이 닿을 것이라 믿었기에.

    그러나 까다로운 코이카의 승인 절차와 거듭되는 보완 요청, 페루 타임에 젖어 있는 현지인들과 부대낌, 메워야 했던 수개월의 시간은 숨이 턱 막히는 스트레스와 깊은 무력감으로 다가왔다.

    방 안에 홀로 앉아 ‘내가 과연 어디까지 짊어지고 갈 수 있을까’ 되뇌며 이방인의 외로움에 몸서리치던 밤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 긴 터널을 지나 마침내 승인이 나던 날의 안도감이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마침내 완공된 학교는 아이들의 몸과 마음을 어루만지는 생명의 공간으로 변모해 있었다. 아무런 장비가 없던 공간에 재활 장비를 채우고 전문 물리치료 교사를 배치해 작업치료실을 열었다. 시각·청각·발달장애나 자폐로 소통이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 태블릿 20대를 도입해 ICT 학습실을 구축했고, AAC 프로그램을 통해 아이콘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맞춤형 개별학습의 길을 텄다.

    8개 교실의 스마트 TV는 선생님들의 수고를 덜고 아이들에게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는 창이 되었다.

    완성된 교실 현판식, 페루 전통에 따라 문 앞에 매달아 둔 물이 든 토기 그릇을 깨뜨리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축제가 시작되었다. 현장 사업의 여정을 발표하는 자리, 스크린 화면 속으로 그간의 치열했던 기록과 슬라이드들이 넘어가는 순간 감격스러움에 그만 울먹이고 말았다.

    코이카 페루 소장님의 인사와 기증서 서명, 주지사의 축사와 CEBE 교장의 감사 인사까지. 이어서 이 학교를 졸업한 장애 학생들의 감동적인 댄스와 남녀 한 쌍이 추는 페루의 정열적인 전통 춤 ‘마리네라’ 축하 속에서 행사는 아름답게 마무리되었다.

    하루의 소란이 가라앉은 방 안, 안데스 산맥을 넘어온 강한 바람과 서늘한 공기가 창문 틈으로 스며든다.

    문득 그동안 켜켜이 쌓아두었던 힘든 과정들이 한 편의 필름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 벽을 마주한 듯 답답했고, 턱 끝까지 차오르는 피로와 스트레스에 매일 밤 지친 몸을 이끌며 ‘내가 왜 이 고생을 자처했을까’ 후회하기도 했다. 르완다의 다짐을 깨고 기꺼이 이 무거운 짐을 짊어졌던 것은, 결국 눈에 밟히는 아이들의 내일을 외면할 수 없었던 뜨거운 마음 한 조각 때문이었다. 특히 개소식 전날, 빗자루와 걸레를 직접 든 학부모들이 구석구석 손수 청소를 도맡아 하시던 그 뭉클한 뒷모습은 평생 잊지 못할 감동이었다.

    그리고 오늘, 그 모든 고뇌와 눈물의 터널을 지나 환하게 웃는 아이들과 학부모들의 얼굴을 마주하며 깨닫는다.

    한국에서는 평범하게 지나쳐 온 나의 시간들이, 이 캄포의 낡은 학교에서는 누군가의 내일을 바꾸는 귀한 자산이 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이곳에 남긴 것은 태블릿과 스마트 TV, 치료 도구들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모든 스트레스와 절망을 딛고 이뤄낸 이 눈부신 성과 앞에서, 나는 비로소 진정한 보람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누군가의 내일을 조금 더 환하게 밝혀주기 위해 기꺼이 건넸던 나의 발걸음. 그 땀방울과 눈물이, 이제 내 남은 인생의 가장 찬란한 보석이 되어 박힌다. 나는 더 이상 낯선 땅의 위태로운 이방인이 아니다. 이 땅의 온기를 품고, 아이들과 학부모 곁을 지키는 진정한 이웃이자 이곳의 주인이다.

  • 페루 와라즈 69호수, 해발 4,600m에서 건넨 안부 – 천상의 푸름보다 가슴에 새겨진 사람들

    페루 와라즈 69호수, 해발 4,600m에서 건넨 안부 – 천상의 푸름보다 가슴에 새겨진 사람들

    여행을 떠나봐야 깨닫는 비밀이 있다. 익숙한 동네를 벗어날 때 내가 얼마나 좁은 세상 안에서 살아왔는지 알게 된다. 낯선 사람들과 부딪히고 낯선 풍경을 마주하다 보면, 세상을 품는 마음의 그릇도 조금씩 넓어진다. 인생이 버겁고 지칠 때면, 가슴 벅찼던 여행의 기억은 그 고비를 버텨내게 하는 마법 같은 힘이 되어준다.

    나이 들어 떠나는 여행은 5성급 호텔에 묵어도 고단하다고 들 한다. 그래서 “여행은 다리 떨릴 때가 아니라 마음 떨릴 때 떠나는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는지도 모른다. 젊은 날엔 꼬질꼬질한 게스트하우스에 묵고 밤새 걸어도 다음 날이면 멀쩡하던 체력, 그 시절이 그립기도 하다. 하지만 60대의 나이에 지구 반대편 페루의 험준한 고산 지역을 기꺼이 견뎌낼 수 있는 체력과 의지가 아직 내게 남아 있음에, 진심으로 감사할 뿐이다.

    페루의 12월은 휴일이 많다. 코이카(KOICA) 봉사자로서 누릴 수 있는 특권 중 하나는 이 거대한 남미 대륙을 품어볼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페루에 처음 도착했을 때는 낯선 언어와 문화 속에서 매일 숨을 쉬고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벅찬 나날이었다. 그러나 어느덧 마음의 여유가 싹트기 시작했고, 우아누코에서 함께 구슬땀을 흘리던 단원 네 명이 마음을 모아 와라즈 ‘69호수’라는 거대한 도전 앞에 섰다.

    새벽 6시, 우아누코(Huánuco)를 출발해 라우니온(La Unión)을 거쳐 와라즈(Huaraz)로 향하는 길은 쉽지 않았다. 콜렉티보 차량을 렌탈해 이동하다가, 수도 파이프 공사로 꽉 막힌 도로 위에서 꼼짝없이 두 시간을 멈춰 서야 했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운전자들과 주민들 사이에 실랑이가 오가는 동안, 창밖으로 비치는 페루의 풍경은 낯설고도 아득했다. 그렇게 굽이굽이 길을 돌아 밤늦게 도착한 와라즈는 다가오는 성탄의 화려한 불빛으로 우리를 환영하고 있었다.

    거대한 고산 트레킹을 앞두고 몸을 추스르기 위해 모인 우리 네 사람. 60대 이상이 세 명, 그리고 20대 청년 한 명. 세대를 뛰어넘은 이 기묘하고도 아름다운 조합은 오직 ‘봉사’라는 공통분모 하나로 깊은 공감을 나누며 밤늦도록 웃음꽃을 피웠다.

    혹독한 고산병을 이겨내기 위해 전날 밤부터 새벽까지 긴장 속에서 고산약을 챙겨 먹었다. 건강에 자신 있던 이까지, 숨조차 쉴 수 없는 미지의 땅에서 누군가에게 ‘민폐’가 되지 않기 위해 서로를 조용히 다독이는 밤이었다.

    이튿날 새벽, 투어 차량에 몸을 싣고 우아스카란 국립공원(Parque Nacional Huascarán)으로 향하는 길. 페루의 DNI 와 60세 이상이라는 나이가 가져다준 뜻밖의 할인 혜택 덕분에 국립공원 입구에서부터 작은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차에 탄 25명의 여행객 중 대부분은 파릇파릇한 20~30대 젊은이들이었고, 우리 일행 중 셋은 그중 가장 연세가 지긋한 세대였다.

    입구에 도착해 본격적인 발걸음을 뗄 때, 온몸으로 밀려오는 것은 체력적 부담과 형언할 수 없는 설렘이었다. 초원과 계곡을 지나 드디어 마주한 ‘지옥의 구간’. 가파른 비탈길은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다. 다섯 걸음 걷고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어야 했고, 미리 싸 온 점심 도시락은 엄두도 나지 않았다. 오직 초콜릿 한 조각과 에너지바, 그리고 물 한 모금에 의지해 위태로운 발걸음을 이어갔다.

    하지만 지독한 숨이 조여오던 그 고통의 구간에서도, 문득문득 마주한 눈부신 풍경은 멈춰 선 발걸음에 다시 걸을 힘을 건네주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숨이 차오를 때마다 시시각각 변하는 아름다운 안데스의 대자연. 햇빛에 빛나는 눈부신 설산, 그 설산에서 맑게 흘러내리는 빙하수 계곡, 그리고 드넓은 초원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는 소와 알파카의 평화로움…….

    그 경이로운 풍경에 취해, 우리는 마치 마법에 걸린 듯 다시 묵묵히 걸음을 재촉했다. 힘겨워하는 우리의 짐을 기꺼이 나누어 메고도 특전사 출신 답게 사슴처럼 가뿐히 산을 오르던 동료의 뒷모습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가파른 경사 앞에서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스쳐 지나가는 전 세계 여행자들이 건네는 목소리는 차가운 공기를 녹이는 온돌 같았다.

    “거의 다 왔어요(Almost there!)!”

    “힘내세요(¡Vamos!)!”

    올라가는 이에게도, 힘겹게 내려오는 이에게도 “조금만 가면 돼요, 힘내요, 정상이 보여요”라며 건네는 짧은 응원. 비록 가도 가도 정상이 나오지 않는 마의 1km였지만, 국경도 언어도 다른 그 이름 모를 동행들이 건넨 따뜻한 눈빛과 온기는 해발 4,600m의 극한 속에서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진정한 ‘전우애’였다.

    발이 물러져 고통스러워하는 여행객에게 비상용으로 챙겨둔 연고와 밴드를 건네며 서로를 보듬었다. 스쳐 지나가는 이들의 눈빛 속에서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온 세상이 함께 걷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마침내 다다른 고통의 끝, 거대한 설산 품에 안긴 69호수의 강렬한 에메랄드빛을 마주한 순간, 우리 일행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터질 듯한 목소리로 “Corea!”를 외쳤다.

    사실 오르는 길은 녹록지 않았다. 심한 고산증과 저체온증으로 20대 대원이 포기를 선언해야 하는 아찔한 위기도 있었다. 해가 지기 전에 하산해야 했다. 선택의 갈림길. 누군가를 돌보다가 모두가 무너질 수 없기에 결국 우리는 냉정한 판단을 해야 했다. 숨을 몰아쉬며 오르던 길, 지나온 발걸음을 뒤돌아봤을 때 눈을 의심케 하는 광경이 펼쳐졌다. 포기했던 그녀가 힘겨운 몸을 이끌고 끈질기게 다시 우리를 향해 올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서로를 향한 간절함과 묵묵한 믿음이 만들어낸 기적 같은 순간이었다. 마침내 네 사람 모두가 정상에 모여 태극기를 펼쳐 들었을 때, 우리는 평생 잊지 못할 가장 뜨거운 동지애를 나누었다.

    하산길은 또 다른 시련이었다. 수많은 여행기들이 입을 모아 말하듯, 내려오는 길이 오르는 것보다 더 지독했다. 발바닥의 찌릿한 통증을 참아가며 국립공원 입구까지 걸어 나오는 길이야말로 내게는 마치 죽음의 길처럼 아득했다. 하지만 무거운 발을 끌고 숙소로 돌아와 마주한 와라즈의 밤바람은 그 모든 고생을 사르르 녹아내리게 했다.

    결국, 거대한 산을 오른다는 것은, 자연과의 싸움이 아니라 나와의 싸움이자, 곁을 끝까지 지켜준 동지들의 뜨거운 온기, 그리고 길 위에서 우연히 스치며 건넨 이름 모를 이들의 따뜻한 안부 덕분에 비로소 완성되는 일이었다.

    시간이 흘러 69호수의 찬란한 사진은 낡아 바래질지 모른다. 하지만 그날, 길 위에서 건네받던 낯선 이들의 다정한 미소와 함께 울고 웃었던 동료들의 눈빛은 내 기억 속에 가장 찬란한 보석으로 남을 것이다.

    낯선 나라에서 맨몸으로 부딪히며 살아간다는 것. 어쩌면 그건, 매일매일 새로운 마음의 지평을 넓혀가는 가장 아름다운 여행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