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반대편의 하루
지도가 발밑이 되던 날
아득하던 대륙이, ‘일상’이 될 때 문득 지갑을 정리하다, 오래된 버스표나 꼬깃꼬깃해진 국경 통과 영수증이 떨어질 때가 있다. 그러면 거짓말처럼, 그 뜨겁고 붉은 대기의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한국에서 바라보던 아프리카와 남미는 지구 반대편의 막연하고 먼 미지의 땅이었다. 뉴스 화면 속 기근과 분쟁, 혹은 다큐멘터리 속 초원을 가로지르는 야생동물 떼 — 딱 그 정도의 납작한 이미지로만 존재하던…
페루 우아누코 GARU 유적지 여행 후기 – 현지 달의 축제 체험
투어를 떠나기까지 여행을 하다 보면 가끔, 별생각 없이 클릭한 광고 하나가 하루 전체를 바꿔놓을 때가 있다. 나에게는 이번이 그랬다. 현지 친구가 툭 던지듯 알려준 문화체험 투어 광고. 그동안 지겹도록 긴 버스, 숨이 턱까지 차오르던 고지대 트레킹에 비하면 이번엔 꽤 편안한 여정일 것 같았다. 우아누코 주 안에서 유적도 보고, 현지인들의 달의 축제까지 직접 볼 수 있다니…
페루의 Campo에서 산다는 것 — 흙 먼지와 별빛 사이, 안데스의 푸른 숨결
페루라고 하면 보통 사람들은 마추픽추나 아름다운 남미의 휴양지들을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내가 삶을 꾸려가고 있는 곳은 ‘Campo(캄뽀)’, 스페인어로 ‘시골’을 뜻하는 곳이다. ‘정겹고, 평화로운’ 느낌을 주는 단어이지만, 사실 처음부터 내가 사는 우아누코(Huánuco)가 시골이라고 생각하진 못했다. 적어도 페루의 다른 큰 도시들을 직접 가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시골이다 보니 한국처럼 소소한 문화생활을 즐길 만한 곳도 마땅치 않다. 그리고 처음…
내가 다시 낯선 나라로 떠난 이유 — 얼떨결에 시작된 인생 2막의 서막
남들보다 조금 일찍 은퇴를 결정했던 건, 내 인생의 두 번째 막을 한시라도 빨리 열어보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만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평소 소심한 성격이었던 나에게 ‘해외봉사’란 두려움 그 자체였다. 어느 날, 세상 물정에 밝고 뭐든 똑부러지던 친구가 KOICA(코이카) 봉사단 이야기를 꺼내며 나를 설명회장으로 데리고 갔다. 설명회를 듣고 나오는 길,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외국어 한마디 제대로…
그들이 내게 건넨 눈빛
페루 우아누코 일기 – 60대에 다시 만난 두 번째 청춘, 숫자가 지워진 땅
숫자가 지워진 땅에서 한국에서 60대라고 하면 은근히 나이의 무게를 짊어지고 점잖게 행동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가 있다. 하지만 우아누코(Huánuco)의 뜨거운 태양 아래, 이방인으로 활보하는 나는 그들에게 이미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젊고 활기 있는 동양인 언니(또는 누나)’ 그 자체였다. 한국에서 내 나이는 슬며시 사려 깊은 어른의 무게를 얹어야 할 숫자였지만, 우아누코의 시장 바닥과 골목길에서 만난…
다시 르완다로 — 우유 한 봉지에 담긴 생명의 무게, 그리고 삶의 절박함
르완다의 붉은 땅, 가슴 아린 삶의 조각들 코로나라는 거센 풍랑 속에서, 마치 전쟁터 같던 키갈리 공항을 떠나온 지 2년 5개월. 팬데믹의 긴 터널을 지나 내가 다시 도착한 르완다의 수도 키갈리는 예전과 달랐다. 맑고 청명했던 하늘은 자욱한 공해로 흐려져 있었고, 길거리를 가득 메운 모토택시들은 거친 경적을 울리며 숨 가쁘게 도로를 메우고 있었다. 지원받은 주거비에 맞춰 어렵게…
르완다 청각장애 학교 이야기 — 아이들의 눈빛 속에 마음을 두고 오다
내가 파견된 곳은 르완다 각지에서 청각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모여드는 기숙 학교였다. 이곳은 나이와 학년이 따로 놀곤 하는 묘한 곳이었다. 가정 형편에 따라 일곱 살 어린 나이에 부모와 떨어져 입학한 1학년 아이가 있는가 하면, 같은 반에 열네 살 큰 형이 함께 앉아 있기도 했다. 엄마가 보고 싶어 눈물이 차올라도, 옆에 있는 형의 눈길에 울음조차 제대로 뱉어내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
페루 와라즈 69호수, 해발 4,600m에서 건넨 안부 – 천상의 푸름보다 가슴에 새겨진 사람들
여행을 떠나봐야 깨닫는 비밀이 있다. 익숙한 동네를 벗어날 때 내가 얼마나 좁은 세상 안에서 살아왔는지 알게 된다. 낯선 사람들과 부딪히고 낯선 풍경을 마주하다 보면, 세상을 품는 마음의 그릇도 조금씩 넓어진다. 인생이 버겁고 지칠 때면, 가슴 벅찼던 여행의 기억은 그 고비를 버텨내게 하는 마법 같은 힘이 되어준다. 나이 들어 떠나는 여행은 5성급 호텔에 묵어도 고단하다고 들…
삶이 물어오고 마음이 건넨 말들
세상과 잇던 탯줄이 끊어지던 날 — 르완다와 페루, 두 번의 도난
르완다, 후예 — 손가락에서 낚아채인 것 적도에 가까운 땅 르완다의 햇볕은 늘 강렬했다. 그 뜨거움이 한풀 꺾이는 오후 5시는 나의 어김없는 산책이자 러닝 타임이었다. 6개월이 넘도록 늘 다니던 익숙한 산책길. 작은 도시 후예(Huye)에서 동양인 여성인 나, 이른바 ‘무중구(Muzungu)’의 존재는 늘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나는 평소 누군가의 타깃이 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건은 여느 날과…
이방인이 앓는 밤 — 혼자 견뎌야 했던 시간들의 외로움
이방인이 앓는 밤 KOICA 봉사자로서 나는 늘 씩씩하고 밝은 사람으로 비쳤을지 모른다. 하지만 낯선 땅에서의 삶이 어찌 매 순간 축제일 수만 있을까. 특히 몸이 아픈 날이면, 홀로 앓아누워 흘려야 했던 눈물 속에서 생각보다 훨씬 깊은 외로움이 밀려왔다. 아픈 몸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곁에 기댈 곳이 없다는 막막함이었다. 르완다에서는 아메바성 장염을 몇 번이고 앓았고, 페루에서는…
낯선 땅 — 은퇴 후 다시 낯선 나라에 살다
은퇴하고 나서야 알았다. 직장을 떠나는 순간,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사회에서 잊힐 수 있다는 것을. 직장에 있을 때는 해야 할 일이 분명했고,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가진 경험과 판단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고,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더 이상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자유로웠다. 하고 싶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