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가 지워진 땅에서
한국에서 60대라고 하면 은근히 나이의 무게를 짊어지고 점잖게 행동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가 있다. 하지만 우아누코(Huánuco)의 뜨거운 태양 아래, 이방인으로 활보하는 나는 그들에게 이미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젊고 활기 있는 동양인 언니(또는 누나)’ 그 자체였다.
한국에서 내 나이는 슬며시 사려 깊은 어른의 무게를 얹어야 할 숫자였지만, 우아누코의 시장 바닥과 골목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눈은 완전히 달랐다. 그들에게 이곳의 60대란 평생의 고단한 삶에 허리가 굽은, 완벽한 노인을 뜻했다. 서툰 스페인어로 눈을 반짝이며 골목을 누비는 나를 보며 할머니가 아니라, 여전히 맨땅에 헤딩하며 세상을 탐험하는 청춘 그 자체로 받아들였다. 숫자가 지워진 땅, 지구 반대편에서 나는 얼떨결에 두 번째 청춘, 찬란한 인생의 회춘을 맛보고 있었다.
수선 집 아줌마와 ‘깐부’가 되기까지
물론 그 낭만적인 환호 뒤에는 날 것의 부딪힘이 있었다. 동네 공원 옆 수선 집에 옷을 맡겼다가, 나이가 엇비슷해 보이는 주인에게 제대로 한 방 먹었다. 옷 값보다 더 비싼 수선 비, 짐을 다시 싸서 나오려는 순간, 가격은 슬금슬금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중에서야 알았다. 그마저도 여전히 턱없이 비싼 값이었다는 걸.

사실 내가 겪은 우아누코 사람들은 의외로 순박했다. 르완다처럼 Mzungu(외국인) 가격이 없다. 소란스럽고 복잡한 시장에 가더라도 시장에 형성된 가격 외에 부당하게 더 얹어 부르는 일은 없었고, 속았다는 씁쓸함이 남은 적도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팽팽하던 경계와 서운함은 시간이 흐르며 부딪히고 정이 들어, 결국 서로의 안부를 살뜰히 챙기는 동네 ‘깐부’가 되었다. “어리다고 얕본 것일까? 나이 어린 동생 같아서 그랬다”며 너스레를 떨던 그 주인은, 알고 보니 나보다 10살이나 어렸다. 그 해맑은 웃음 앞에 서면 뾰족했던 마음도 스르르 녹아내리곤 했다.
시장 닭장수 아저씨가 건넨 “가장 신선한 닭”의 비밀
시장에서 마주한 풍경은 또 다른 결의 충격이었다. 토요일마다 열리는 재래시장은 그날 가져온 물건이 그날 팔려나가기에 늘 신선하다. 냉장고 없는 이 길거리 시장에서는 농산물은 물론, 생선과 고기까지 고스란히 그렇게 유통된다.
생 닭을 진열해 놓고 팔던 아저씨는 나이가 지긋해 보였지만, 알고 보니 그 역시 나보다 10살이나 어렸다. 늘 친절하던 그는 단골인 나를 누님보다는 굳이 친구(Amiga)여야 한다고 우기곤 했다. 어느 날, 이 닭이 괜찮냐고 물었다가, 나는 예상치 못한 광경 앞에서 숨을 멈추고 말았다. “신선한 닭을 주겠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고 기다렸다. 묶여 있던 살아있는 닭이 그 자리에서 목이 비틀리는 과정을 그대로 지켜보게 된 것이다. 남미 전통 시장만이 가진, 타협 없는 생명의 날 것 그대로의 풍경.

따지고 보면 그야말로 지구상에서 가장 신선한 닭이 맞았지만, 그 충격은 꽤 오랫동안 가시지 않았다. 이방인으로 산다는 건, 이렇게 거친 문화의 속살을 예고 없이 통째로 삼켜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거친 길 위에서 익어간다는 것
문득, 깊은 사유에 잠기게 된다. 같은 60세라도, 한국과 페루 고산 지대 주민들의 체감 연령과 신체적 노화의 정도는 크게 다르다. 한국의 60 대는 우수한 의료 시스템과 체계적인 관리, 실내 중심의 생활 덕분에 비교적 젊은 신체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페루 산 간 지방의 60 대는 치아 손실을 비롯해, 평생을 강한 고산 지대 햇빛과 고된 야외 노동 속에서 살아온 흔적이 얼굴의 깊은 주름으로 고스란히 드러난다.

언뜻 훨씬 나이 들어 보일지 몰라도, 그 깊은 주름 하나하나는 고산지대의 가혹한 환경을 묵묵히 견뎌낸 억척스러운 삶의 훈장이다. 그리고 비단 페루 사람들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척박한 세월을 맨몸으로 버텨내며 우리를 키워내신, 우리 부모님 세대의 얼굴 역시 그러했다.
바가지를 씌우던 이웃은 끝내 마음을 나누는 친구가 되었고, 눈을 질끈 감게 했던 시장의 충격적인 풍경마저 이제는 가슴 시린 일상의 소중한 조각이 되었다. 이방인으로서 거쳐야 할 모든 파란만장한 소소한 소동들을, 나는 이제 60대의 연륜과 따뜻한 유머로 품어 안는다.
인생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다.
이토록 뜨겁고 유쾌하게, 깊이 익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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