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그들이 내게 건넨 눈빛

  • 페루 우아누코 일기 – 60대에 다시 만난 두 번째 청춘, 숫자가 지워진 땅

    페루 우아누코 일기 – 60대에 다시 만난 두 번째 청춘, 숫자가 지워진 땅

    숫자가 지워진 땅에서

    한국에서 60대라고 하면 은근히 나이의 무게를 짊어지고 점잖게 행동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가 있다. 하지만 우아누코(Huánuco)의 뜨거운 태양 아래, 이방인으로 활보하는 나는 그들에게 이미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젊고 활기 있는 동양인 언니(또는 누나)’ 그 자체였다.

    한국에서 내 나이는 슬며시 사려 깊은 어른의 무게를 얹어야 할 숫자였지만, 우아누코의 시장 바닥과 골목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눈은 완전히 달랐다. 그들에게 이곳의 60대란 평생의 고단한 삶에 허리가 굽은, 완벽한 노인을 뜻했다. 서툰 스페인어로 눈을 반짝이며 골목을 누비는 나를 보며 할머니가 아니라, 여전히 맨땅에 헤딩하며 세상을 탐험하는 청춘 그 자체로 받아들였다. 숫자가 지워진 땅, 지구 반대편에서 나는 얼떨결에 두 번째 청춘, 찬란한 인생의 회춘을 맛보고 있었다.

    수선 집 아줌마와 ‘깐부’가 되기까지

    물론 그 낭만적인 환호 뒤에는 날 것의 부딪힘이 있었다. 동네 공원 옆 수선 집에 옷을 맡겼다가, 나이가 엇비슷해 보이는 주인에게 제대로 한 방 먹었다. 옷 값보다 더 비싼 수선 비, 짐을 다시 싸서 나오려는 순간, 가격은 슬금슬금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중에서야 알았다. 그마저도 여전히 턱없이 비싼 값이었다는 걸.

    사실 내가 겪은 우아누코 사람들은 의외로 순박했다. 르완다처럼 Mzungu(외국인) 가격이 없다. 소란스럽고 복잡한 시장에 가더라도 시장에 형성된 가격 외에 부당하게 더 얹어 부르는 일은 없었고, 속았다는 씁쓸함이 남은 적도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팽팽하던 경계와 서운함은 시간이 흐르며 부딪히고 정이 들어, 결국 서로의 안부를 살뜰히 챙기는 동네 ‘깐부’가 되었다. “어리다고 얕본 것일까? 나이 어린 동생 같아서 그랬다”며 너스레를 떨던 그 주인은, 알고 보니 나보다 10살이나 어렸다. 그 해맑은 웃음 앞에 서면 뾰족했던 마음도 스르르 녹아내리곤 했다.

    시장 닭장수 아저씨가 건넨 “가장 신선한 닭”의 비밀

    시장에서 마주한 풍경은 또 다른 결의 충격이었다. 토요일마다 열리는 재래시장은 그날 가져온 물건이 그날 팔려나가기에 늘 신선하다. 냉장고 없는 이 길거리 시장에서는 농산물은 물론, 생선과 고기까지 고스란히 그렇게 유통된다.

    생 닭을 진열해 놓고 팔던 아저씨는 나이가 지긋해 보였지만, 알고 보니 그 역시 나보다 10살이나 어렸다. 늘 친절하던 그는 단골인 나를 누님보다는 굳이 친구(Amiga)여야 한다고 우기곤 했다. 어느 날, 이 닭이 괜찮냐고 물었다가, 나는 예상치 못한 광경 앞에서 숨을 멈추고 말았다. “신선한 닭을 주겠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고 기다렸다. 묶여 있던 살아있는 닭이 그 자리에서 목이 비틀리는 과정을 그대로 지켜보게 된 것이다. 남미 전통 시장만이 가진, 타협 없는 생명의 날 것 그대로의 풍경.

    따지고 보면 그야말로 지구상에서 가장 신선한 닭이 맞았지만, 그 충격은 꽤 오랫동안 가시지 않았다. 이방인으로 산다는 건, 이렇게 거친 문화의 속살을 예고 없이 통째로 삼켜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거친 길 위에서 익어간다는 것

    문득, 깊은 사유에 잠기게 된다. 같은 60세라도, 한국과 페루 고산 지대 주민들의 체감 연령과 신체적 노화의 정도는 크게 다르다. 한국의 60 대는 우수한 의료 시스템과 체계적인 관리, 실내 중심의 생활 덕분에 비교적 젊은 신체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페루 산 간 지방의 60 대는 치아 손실을 비롯해, 평생을 강한 고산 지대 햇빛과 고된 야외 노동 속에서 살아온 흔적이 얼굴의 깊은 주름으로 고스란히 드러난다.

    언뜻 훨씬 나이 들어 보일지 몰라도, 그 깊은 주름 하나하나는 고산지대의 가혹한 환경을 묵묵히 견뎌낸 억척스러운 삶의 훈장이다. 그리고 비단 페루 사람들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척박한 세월을 맨몸으로 버텨내며 우리를 키워내신, 우리 부모님 세대의 얼굴 역시 그러했다.

    바가지를 씌우던 이웃은 끝내 마음을 나누는 친구가 되었고, 눈을 질끈 감게 했던 시장의 충격적인 풍경마저 이제는 가슴 시린 일상의 소중한 조각이 되었다. 이방인으로서 거쳐야 할 모든 파란만장한 소소한 소동들을, 나는 이제 60대의 연륜과 따뜻한 유머로 품어 안는다.

    인생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다.

    이토록 뜨겁고 유쾌하게, 깊이 익어가는 것이다.

  • 다시 르완다로 — 우유 한 봉지에 담긴 생명의 무게, 그리고 삶의 절박함

    다시 르완다로 — 우유 한 봉지에 담긴 생명의 무게, 그리고 삶의 절박함

    르완다의 붉은 땅, 가슴 아린 삶의 조각들

    코로나라는 거센 풍랑 속에서, 마치 전쟁터 같던 키갈리 공항을 떠나온 지 2년 5개월. 팬데믹의 긴 터널을 지나 내가 다시 도착한 르완다의 수도 키갈리는 예전과 달랐다. 맑고 청명했던 하늘은 자욱한 공해로 흐려져 있었고, 길거리를 가득 메운 모토택시들은 거친 경적을 울리며 숨 가쁘게 도로를 메우고 있었다.

    지원받은 주거비에 맞춰 어렵게 구한 집은 바퀴벌레의 온상이었고, 매일 아침이면 벽을 타고 오르내리는 도마뱀이 낯선 이방인을 반겼다. 익숙함은 사라지고, 더욱 험난해진 현실이 나를 먼저 맞이했다.

    내가 배치된 곳은 레메라 보건소, 이곳은 가난과 질병의 그늘이 가장 짙게 드리워진 곳이었다. 매일 보건소 마당에는 끝도 없이 길게 늘어선 사람들의 줄이 이어졌다.

    이름만 입력하면 모든 정보가 나오는 한국의 전산시스템과 달리, 수많은 종이 파일 속에서 일일이 환자 카드를 찾고 손으로 기록을 남겨야 했다.

    보건소를 찾는 환자들의 대부분은 AIDS 환자들이었다. 병의 경중에 따라 30일 또는 60일에 한 번씩 약을 받으러 찾아왔다. 놀랍게도 그들은 자신의 질병을 담담하게, 때로는 밝은 표정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밝은 얼굴 뒤에는 늘 서늘한 두려움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면역력이 떨어진 그들에게 폐질환 같은 합병증이 찾아오는 날은 곧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평소 유쾌하게 인사를 건네던 30대의 한 환자가, 그날따라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한 채 서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내 가슴은 덜컥 내려앉았다.

    나의 주요 직무는 영양실조 파트였다. AIDS 가정과 영양실조 아동들을 발굴하고, 일주일에 한 번 우유나 영양식을 나눠주는 일이었다.

    그러나 따뜻한 시선만으로는 품어내기 힘든, 가슴 시린 현실의 벽에 부딪히는 날들이 많았다. 기부로 들어오는 우유는 유통기한이 없었기에, 부정 유통을 막기 위해 우리는 지난주에 나눠준 빈 우유 봉투를 일일이 회수하여 확인했다. 이를 저렴하게 재래시장에 파는 이들이 있었고, 어떤 이들은 봉투 수량을 채우려 길거리에 버려진 더러운 빈 봉투를 주워 오기도 했다.

    어느 날, 영양식이 전면 중단될 위기에 처했던 20대의 어린 엄마, 나는 보건소 한쪽 구석에서 어깨를 들썩인 채 울고 있던 그 엄마를 마주했다. 붉어진 눈시울로 그녀의 손을 잡고 물었을 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나를 깊은 충격에 빠뜨렸다.

    “우유는 내 아이 한 명의 배를 채우지만, 그 우유를 팔아 감자를 사면 우리 온 가족이 굶지 않고 며칠을 버틸 수 있어요…”

    우리가 생각했던 ‘영양’과 그들이 살아내는 ‘생존’의 기준은 너무나 달랐다. 한국에서 챙겨온 여분의 옷을 건네주어도 그들은 입지 않고 시장에 나가 팔았다. 당장의 하루를 살아내야 하는 그들에게 옷과 우유는 단순한 생활용품이 아닌, 가족의 생계를 잇는 유일한 화폐였던 것이다. 비난할 수도, 탓할 수도 없는 그들의 일상이 내 마음에 묵직한 돌덩이 하나를 얹어놓았다.

    그렇게 그들의 삶 속으로 깊숙이 들어간 지 1년. 나는 지역주민들의 기초 보건의료체계를 바꾸는 현장사업에 착수했다. 모성 사망률을 낮추기 위한 의료장비를 도입하고, 땔감 연기와 강렬한 태양 때문에 눈이 상한 주민들을 위해 안과 장비를 갖추었다.

    무엇보다 환자들이 뙤약볕 아래서 무한정 기다려야 했던 그 길고 길었던 줄을 줄여주기 위해, 접수부터 결제까지 이어지는 온라인 전산 환경을 구축했다.

    새로운 방식을 받아들이는 것조차 쉽지 않았던 현지 직원들 사이에서, 아들처럼 영리하고 유능한 젊은 보건소장이 큰 힘이 되어주었다. 그가 없었다면 결코 해내지 못했을 일이다.

    악명 높은 ‘르완다 타임’을 극복하고 마침내 첫 온라인 전산 접수가 이루어지던 날, 보건소 앞마당의 줄은 눈에 띄게 줄어들어 있었다.

    돌아보면 그 낯선 땅에서 내가 건넨 것은 한 팩의 우유와 새로운 장비였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나에게 건넨 것은 삶의 절박함과 그 안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생명의 무게였다.

    떠나보니 비로소 보이는 것들. 르완다의 붉은 땅에서, 나는 오늘도 그 소중하고 아린 삶의 조각들을 하나씩 가슴에 담아 기록한다.

  • 르완다 청각장애 학교 이야기 — 아이들의 눈빛 속에 마음을 두고 오다

    르완다 청각장애 학교 이야기 — 아이들의 눈빛 속에 마음을 두고 오다

    내가 파견된 곳은 르완다 각지에서 청각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모여드는 기숙 학교였다.

    이곳은 나이와 학년이 따로 놀곤 하는 묘한 곳이었다. 가정 형편에 따라 일곱 살 어린 나이에 부모와 떨어져 입학한 1학년 아이가 있는가 하면, 같은 반에 열네 살 큰 형이 함께 앉아 있기도 했다. 엄마가 보고 싶어 눈물이 차올라도, 옆에 있는 형의 눈길에 울음조차 제대로 뱉어내지 못하던 어린아이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 아이들은 각자 침대 매트와 양동이 하나씩을 들고 학교로 들어온다. 그 양동이는 아이들이 씻을 때 사용하는 소박한 일상의 도구이자 전부였다.

    입학과 동시에 아이들은 수화를 배운다. 처음에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으니 선생님들은 칠판에 그림을 그려가며 뜻을 전하지만, 신기하게도 학년이 올라갈수록 아이들은 자유롭게 수화로 소통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참 마음이 아팠던 것은, 공부를 더 하고 싶어도 르완다에는 수화로 교육받을 수 있는 상급학교가 없다는 현실이었다.

    그래서 5~6학년이 되면 아이들은 목공반, 미싱반, 미용반 등에 들어가 사회로 나갈 준비를 한다. 장애와 가난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기 힘든 삶이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아프리카는 일 년 내내 무덥기만 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르완다는 연중 우리나라의 초가을 같은 날씨가 계속된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엄청난 추위를 느낀다. 따뜻한 방과 두툼한 이불이 익숙한 우리와 달리, 차가운 맨땅에 거적때기 하나 깔고 잠에서 깨어나는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인데도 두꺼운 패딩을 입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결코 낯선 풍경이 아니다. 그나마 불을 피울 형편이 되는 집 아이들은 아침에 따뜻한 포리지(죽) 한 잔을 마시며 추위를 견뎌낸다.

    쉬는 시간이 되면 아이들은 학교 처마 밑으로 오밀조밀 모여든다. 비를 피하는 곳이자, 햇볕을 모아 몸을 녹이는 따스한 쉼터이기 때문이다. 축구공 하나 없어 바나나 잎을 동그랗게 뭉쳐 만든 공을 차며 놀던 아이들. 나는 그 아이들을 위해 스포츠 용품을 지원하고, 보건실을 운영하며 위생 및 보건 교육을 시작했다.

    다쳐서 피를 흘려도 병원비 부담 때문에 치료는 엄두도 내지 못하던 아이들이었다. 진통제와 비상 구급약품을 구비해 두고 다친 아이들의 상처를 치료해 주는 것이 나의 중요한 일상이 되었다.

    더 나아가 아이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싶어 ‘현장사업’을 추진했다. 아이들의 장애가 선천적인지, 후천적인지를 구별할 수 있는 검사실을 구축하는 사업이었다. 선천적이라면 수화를 통한 맞춤형 교육을 하고, 후천적이라면 보청기 착용이나 재활 치료를 통해 소리를 찾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싶었다. 다행히 사업 승인을 받았고, 이제 막 착수금이 들어오려던 바로 그 찰나, Covid-19라는 거대한 재앙이 전 세계를 덮치고 말았다.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다. 르완다 정부는 첫 확진자가 나온 다음 날, 전국의 모든 학교에 폐쇄령을 내렸다. 그렇게 나는 아이들과 마지막 작별 인사조차 나누지 못한 채 쫓기듯 귀국길에 올라야 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학교 교장 선생님에게서 메일이 도착했다.

    “너는 봉사자 이상이었고, 이 아이들의 엄마였다.”

    메일을 읽는 순간 참았던 눈물이 왈칵 터져 나왔다.

    지금도 그 아이들이 사무치게 그립다. 검은 얼굴 위로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빛나던, 그토록 예쁜 아이들의 얼굴이 보고 싶다.

    사실 그곳의 삶이 늘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방학이 끝나고 돌아오는 여학생들 중에는 이웃집 어른들에게 성폭행을 당해 임신한 채 돌아오는 가슴 아픈 일들도 있었다.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든 비극이었지만, 아이들은 그 아픔마저 삶으로 품어내며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웃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난과 상처 속에서 맑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아이들을 보며 나는 수없이 많은 것을 배웠다. 내가 도우러 갔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초롱초롱하게 살아있는 아이들의 눈빛과 순수한 미소 속에서 지친 내 마음이 치유되고 가슴이 다시 뛰는 것을 느꼈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손짓과 눈빛으로 아이들과 충분히 소통할 수 있었다. 낯선 땅의 언어는 머리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배운다는 것을 그때 깊이 깨달았다.

    나는 도우러 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아이들의 살아있는 눈빛을 보고 사랑을 받으며, 삶의 진정한 의미를 배웠다.

    처마 밑에서 따스한 햇살을 쬐며 나를 향해 해맑게 웃어주던 그 예쁜 눈빛들이 오늘따라 더욱 그리워진다.

  •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Campo의 친구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Campo의 친구들

    지구 반대편, 모든 것이 낯설고 숨이 턱 막히던 우아누코의 첫날을 기억한다.

    편안하고 익숙했던 한국의 삶을 기꺼이 뒤로하고 이 먼 땅에 발을 디뎠을 때, 문득 가슴 한구석에서 치밀어 오르던 서글픔을 숨길 수가 없었다. ‘내가 대체 무엇을 위해 이 고생을 자처한 거지?’ 휑한 방안에 홀로 남겨졌을 때 밀려오던 그 막막함이란. 언어도, 공기도, 눈에 닿는 모든 풍경도 칼날처럼 낯설기만 하던 캄포의 일상 속에서 나는 위태로운 이방인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차갑고 거친 벽을 가장 먼저 맨손으로 허물어준 이들이 있었다.

    한국을 향한 순수한 애정으로 뭉친 모임, ‘페코바라기’.

    알고 보니 그들은 이 작은 도시 우아누코에서 각자의 자리와 기반을 갖추고 안정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나를 대할 때는 그 어떤 특권의식도, 거리감도 없었다. OJT 시절 둥지를 틀 집을 구하는 발걸음부터, 재래시장의 구석구석, 생필품을 파는 가게, 은행 업무, 그리고 낯선 지명과 모토 택시의 기본요금 하나까지. 처음 온 이방인이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지, 그들은 살림을 가르치듯 내 손을 잡고 세상의 길을 열어주었다.

    그것은 단순한 호의가 아니었다. 낯선 땅에서 혼자 버티며 숨죽일 나를 향한 가장 따뜻한 구원이었다.

    해외에 오래 살수록 느끼는 건, “저는 혼자서도 잘해요”가 결코 자랑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힘들 때 전화할 사람, 같이 밥 먹을 사람, 이유 없이 만날 사람이 있는 것도 삶을 잘 꾸려나가는 능력이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삶의 질을 결정하는 건 결국 ‘오늘 저녁 같이 먹을래요?’라고 편하게 연락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해외 생활에서 인간관계는 단순한 옵션이 아니라 삶을 지탱하는 인프라이다. 잘 산다는 건 혼자서 뭐든 악착같이 해내는 게 아니라, 어디에 살든 내 사람들과 연결되어 사는 것 같다. 사람과 연결되어 살아가는 것이 결국 나를 건강하게 살아가게 하는 힘인지도 모른다.

    한국인이라고 해서 꼭 한국인하고 만 어울릴 필요도 없다. 한인 커뮤니티도 물론 소중하지만 그곳에만 머물면 내가 사는 세상은 생각보다 좁아진다. 현지 친구, 다른 나라에서 온 친구, 나와는 전혀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어우러지는 것.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해외에 산다는 것의 가장 큰 특권이 아닐까.

    그 특권을, 나는 ‘페코바라기’ 친구들과 함께 누리고 있었다.

    그 다정한 인연은 얕은 동정에 머물지 않았다. 그들은 나라는 사람, 그리고 한국이라는 나라와의 관계를 진심으로 깊이 있게 이어가고 싶어 했다.

    그들은 내가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재료를 미리 준비해 두고, 마치 한국음식 강사를 초청하듯 나를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불러주었다. 함께 만들고 체험하는 자리였다.

    루루의 집에서 함께 빚던 송편과 떡국, 북적거리던 식당에서 웃음꽃을 피우며 맛보던 김밥과 떡볶이, 플로르의 집안 가득 고소하게 퍼지던 잡채 냄새까지.

    몇 차례에 걸쳐 이어진 그 맛의 향연 속에서, 그들이 보여준 반응은 “어머, 맛이 너무 환상적이에요!”라며 감탄을 터뜨렸다. 함께 음식을 만들고 서툴게 빚은 모양을 보며 박수를 치며 웃던 그 시간들 속에서 우리는 이미 국경을 넘어 진짜 친구가 되어 있었다.

    한식에서 끝이 아니었다. 우리는 한복의 고운 자락이 담긴 ‘노리개’를 함께 만드는 작업에도 도전했다.

    한 땀 한 땀 손끝에 정성을 모아 노리개를 빚어냈고,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직접 행사 부스를 열어 우아누코 사람들에게 우리 문화를 알리고 판매하는 즐거움까지 누렸다.

    행사가 끝날 때마다 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다음에 또 해주세요!”라고 외치던 그들의 목소리는, 지친 내게 일상을 버텨낼 가장 찬란한 연료였다.

    이제 우아누코의 거리를 걷다 우연히 그들을 마주치면, 마치 고향의 다정한 옆집 아줌마를 만난 것처럼 가슴속에서부터 뭉클한 반가움이 왈칵 차오른다. 어디에서 어떤 축제가 있는지 소식을 먼저 전하고 안부를 묻는 그들의 마음을 보며, 나는 깨닫는다.

    내가 이 낯선 땅에 스스로 뿌리를 내린 것이 아니었다.

    그 사람들이, 그 따뜻한 온기가 나를 이곳에 기꺼이 살아가게 붙들어 매어 준 것이었다.

    모든 것이 두렵고 불편하기만 했던 캄포의 하루하루. 그러나 이제 그 시간들은 날카로운 상처가 아니라, 내 삶에서 가장 깊고 찬란한 무늬가 되었다. 그리고 그 무늬의 결마다, 지구 반대편에서 건너와 내 생의 가장 소중한 인연이 된 이들의 따뜻한 얼굴이 새겨져 있다.

  • 지구 반대편에 울려 퍼진 애국가, 그곳에 남겨진 숨결

    지구 반대편에 울려 퍼진 애국가, 그곳에 남겨진 숨결

    지구 반대편 낯선 고산 도시 한복판에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 나의 작은 성취와 헌신으로 이 Campo 우아누코에 내 나라의 애국가를 부르는 순간 시야가 흐려졌다. 해외에 나가봐야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증명되는 셈이다. 그동안 겪었던 온갖 서러움과 땀방울이 주마등처럼 스치며 나도 모르게 가슴이 벅차고 뜨거워졌다.

    맘 졸이며 준비했던 프로젝트의 개소식(기증식) 날이다. 코이카 소장님도 오셨고 단원들도 모두 참석해주었다. 그리고 우아누코주의 주지사가 자리를 빛내주었다. 주지사의 스케줄에 따라 프로그램은 이리저리 밀리고 조금은 엉망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행사는 성공이었다.

    하지만 이 벅찬 환희에 이르기까지, 처음 마주했던 우아누코의 CEBE 특수교육센터는 막막함 그 자체였다. 빗물이 새고 태양을 제대로 피할 수 없는 낡은 처마 밑. 버려진 박스를 주워다 교구를 만들며 아이들을 품어내던 선생님들의 지친 손길.

    아무런 장비도 없는 열악한 환경에 놓인 교실을 바라보며 나는 끊임없이 물었다. “이 아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게 뭘까?”

    아프리카 르완다의 붉은 먼지 속에서 ‘다시는 현장사업에 삶을 매이지 않으리라’ 다짐했건만, 뻔히 보이는 예산과 눈에 밟히는 아이들의 필요 앞에서 결국 그 다짐은 무너지고 말았다. 내가 조금 더 고단하고 땀 흘리면 누군가의 삶에 선한 영향력이 닿을 것이라 믿었기에.

    그러나 까다로운 코이카의 승인 절차와 거듭되는 보완 요청, 페루 타임에 젖어 있는 현지인들과 부대낌, 메워야 했던 수개월의 시간은 숨이 턱 막히는 스트레스와 깊은 무력감으로 다가왔다.

    방 안에 홀로 앉아 ‘내가 과연 어디까지 짊어지고 갈 수 있을까’ 되뇌며 이방인의 외로움에 몸서리치던 밤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 긴 터널을 지나 마침내 승인이 나던 날의 안도감이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마침내 완공된 학교는 아이들의 몸과 마음을 어루만지는 생명의 공간으로 변모해 있었다. 아무런 장비가 없던 공간에 재활 장비를 채우고 전문 물리치료 교사를 배치해 작업치료실을 열었다. 시각·청각·발달장애나 자폐로 소통이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 태블릿 20대를 도입해 ICT 학습실을 구축했고, AAC 프로그램을 통해 아이콘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맞춤형 개별학습의 길을 텄다.

    8개 교실의 스마트 TV는 선생님들의 수고를 덜고 아이들에게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는 창이 되었다.

    완성된 교실 현판식, 페루 전통에 따라 문 앞에 매달아 둔 물이 든 토기 그릇을 깨뜨리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축제가 시작되었다. 현장 사업의 여정을 발표하는 자리, 스크린 화면 속으로 그간의 치열했던 기록과 슬라이드들이 넘어가는 순간 감격스러움에 그만 울먹이고 말았다.

    코이카 페루 소장님의 인사와 기증서 서명, 주지사의 축사와 CEBE 교장의 감사 인사까지. 이어서 이 학교를 졸업한 장애 학생들의 감동적인 댄스와 남녀 한 쌍이 추는 페루의 정열적인 전통 춤 ‘마리네라’ 축하 속에서 행사는 아름답게 마무리되었다.

    하루의 소란이 가라앉은 방 안, 안데스 산맥을 넘어온 강한 바람과 서늘한 공기가 창문 틈으로 스며든다.

    문득 그동안 켜켜이 쌓아두었던 힘든 과정들이 한 편의 필름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 벽을 마주한 듯 답답했고, 턱 끝까지 차오르는 피로와 스트레스에 매일 밤 지친 몸을 이끌며 ‘내가 왜 이 고생을 자처했을까’ 후회하기도 했다. 르완다의 다짐을 깨고 기꺼이 이 무거운 짐을 짊어졌던 것은, 결국 눈에 밟히는 아이들의 내일을 외면할 수 없었던 뜨거운 마음 한 조각 때문이었다. 특히 개소식 전날, 빗자루와 걸레를 직접 든 학부모들이 구석구석 손수 청소를 도맡아 하시던 그 뭉클한 뒷모습은 평생 잊지 못할 감동이었다.

    그리고 오늘, 그 모든 고뇌와 눈물의 터널을 지나 환하게 웃는 아이들과 학부모들의 얼굴을 마주하며 깨닫는다.

    한국에서는 평범하게 지나쳐 온 나의 시간들이, 이 캄포의 낡은 학교에서는 누군가의 내일을 바꾸는 귀한 자산이 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이곳에 남긴 것은 태블릿과 스마트 TV, 치료 도구들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모든 스트레스와 절망을 딛고 이뤄낸 이 눈부신 성과 앞에서, 나는 비로소 진정한 보람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누군가의 내일을 조금 더 환하게 밝혀주기 위해 기꺼이 건넸던 나의 발걸음. 그 땀방울과 눈물이, 이제 내 남은 인생의 가장 찬란한 보석이 되어 박힌다. 나는 더 이상 낯선 땅의 위태로운 이방인이 아니다. 이 땅의 온기를 품고, 아이들과 학부모 곁을 지키는 진정한 이웃이자 이곳의 주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