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파견된 곳은 르완다 각지에서 청각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모여드는 기숙 학교였다.
이곳은 나이와 학년이 따로 놀곤 하는 묘한 곳이었다. 가정 형편에 따라 일곱 살 어린 나이에 부모와 떨어져 입학한 1학년 아이가 있는가 하면, 같은 반에 열네 살 큰 형이 함께 앉아 있기도 했다. 엄마가 보고 싶어 눈물이 차올라도, 옆에 있는 형의 눈길에 울음조차 제대로 뱉어내지 못하던 어린아이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 아이들은 각자 침대 매트와 양동이 하나씩을 들고 학교로 들어온다. 그 양동이는 아이들이 씻을 때 사용하는 소박한 일상의 도구이자 전부였다.

입학과 동시에 아이들은 수화를 배운다. 처음에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으니 선생님들은 칠판에 그림을 그려가며 뜻을 전하지만, 신기하게도 학년이 올라갈수록 아이들은 자유롭게 수화로 소통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참 마음이 아팠던 것은, 공부를 더 하고 싶어도 르완다에는 수화로 교육받을 수 있는 상급학교가 없다는 현실이었다.

그래서 5~6학년이 되면 아이들은 목공반, 미싱반, 미용반 등에 들어가 사회로 나갈 준비를 한다. 장애와 가난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기 힘든 삶이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아프리카는 일 년 내내 무덥기만 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르완다는 연중 우리나라의 초가을 같은 날씨가 계속된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엄청난 추위를 느낀다. 따뜻한 방과 두툼한 이불이 익숙한 우리와 달리, 차가운 맨땅에 거적때기 하나 깔고 잠에서 깨어나는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인데도 두꺼운 패딩을 입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결코 낯선 풍경이 아니다. 그나마 불을 피울 형편이 되는 집 아이들은 아침에 따뜻한 포리지(죽) 한 잔을 마시며 추위를 견뎌낸다.
쉬는 시간이 되면 아이들은 학교 처마 밑으로 오밀조밀 모여든다. 비를 피하는 곳이자, 햇볕을 모아 몸을 녹이는 따스한 쉼터이기 때문이다. 축구공 하나 없어 바나나 잎을 동그랗게 뭉쳐 만든 공을 차며 놀던 아이들. 나는 그 아이들을 위해 스포츠 용품을 지원하고, 보건실을 운영하며 위생 및 보건 교육을 시작했다.
다쳐서 피를 흘려도 병원비 부담 때문에 치료는 엄두도 내지 못하던 아이들이었다. 진통제와 비상 구급약품을 구비해 두고 다친 아이들의 상처를 치료해 주는 것이 나의 중요한 일상이 되었다.
더 나아가 아이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싶어 ‘현장사업’을 추진했다. 아이들의 장애가 선천적인지, 후천적인지를 구별할 수 있는 검사실을 구축하는 사업이었다. 선천적이라면 수화를 통한 맞춤형 교육을 하고, 후천적이라면 보청기 착용이나 재활 치료를 통해 소리를 찾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싶었다. 다행히 사업 승인을 받았고, 이제 막 착수금이 들어오려던 바로 그 찰나, Covid-19라는 거대한 재앙이 전 세계를 덮치고 말았다.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다. 르완다 정부는 첫 확진자가 나온 다음 날, 전국의 모든 학교에 폐쇄령을 내렸다. 그렇게 나는 아이들과 마지막 작별 인사조차 나누지 못한 채 쫓기듯 귀국길에 올라야 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학교 교장 선생님에게서 메일이 도착했다.
“너는 봉사자 이상이었고, 이 아이들의 엄마였다.”
메일을 읽는 순간 참았던 눈물이 왈칵 터져 나왔다.
지금도 그 아이들이 사무치게 그립다. 검은 얼굴 위로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빛나던, 그토록 예쁜 아이들의 얼굴이 보고 싶다.
사실 그곳의 삶이 늘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방학이 끝나고 돌아오는 여학생들 중에는 이웃집 어른들에게 성폭행을 당해 임신한 채 돌아오는 가슴 아픈 일들도 있었다.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든 비극이었지만, 아이들은 그 아픔마저 삶으로 품어내며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웃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난과 상처 속에서 맑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아이들을 보며 나는 수없이 많은 것을 배웠다. 내가 도우러 갔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초롱초롱하게 살아있는 아이들의 눈빛과 순수한 미소 속에서 지친 내 마음이 치유되고 가슴이 다시 뛰는 것을 느꼈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손짓과 눈빛으로 아이들과 충분히 소통할 수 있었다. 낯선 땅의 언어는 머리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배운다는 것을 그때 깊이 깨달았다.
나는 도우러 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아이들의 살아있는 눈빛을 보고 사랑을 받으며, 삶의 진정한 의미를 배웠다.

처마 밑에서 따스한 햇살을 쬐며 나를 향해 해맑게 웃어주던 그 예쁜 눈빛들이 오늘따라 더욱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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