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가 발밑이 되던 날

페루 비니쿤카의 형형색색 안데스 산맥과 푸른 하늘이 펼쳐진 풍경

아득하던 대륙이, ‘일상‘이 될 때

문득 지갑을 정리하다, 오래된 버스표나 꼬깃꼬깃해진 국경 통과 영수증이 떨어질 때가 있다. 그러면 거짓말처럼, 그 뜨겁고 붉은 대기의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한국에서 바라보던 아프리카와 남미는 지구 반대편의 막연하고 먼 미지의 땅이었다. 뉴스 화면 속 기근과 분쟁, 혹은 다큐멘터리 속 초원을 가로지르는 야생동물 떼 — 딱 그 정도의 납작한 이미지로만 존재하던 대륙이었다.

그런데 막상 그곳에 ‘살게 되면서’, 생각지도 못한 마법 같은 변화가 일어났다. 지도 위의 까만 점에 불과했던 나라들이, 어느새 내 삶의 좌표가 되어 있었다. 며칠 머물다 스쳐 가는 관광객의 시선이 아니라, 그 땅의 붉은 흙먼지를 신발 밑창에 묻히고 그 묵직한 공기를 매일 들이마시는 ‘생활자’의 시선으로 나는 비로소 대륙을 마주하게 되었다.

르완다 — 국경을 넘어 아프리카를 품다

르완다에 살기 전, 나에게 아프리카는 여행지가 아니었다. 후원 캠페인 홍보 영상 속에서나 스쳐 지나가던 땅, 헐벗은 아이들과 마른 대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결코, 내 삶이 닿을 수 없는 아득히 먼 세계였다.

하지만 살다 보니, 인접한 국경을 버스에 몸을 싣고 육로로 넘는 날들이 생겼다. 비행기를 타야만 바다를 건널 수 있던 한국에서의 삶과는 완전히 다른 결의 세계였다. 덜컹거리는 버스 창밖으로 스쳐 가는 황토빛 언덕들, 국경 초소에서 여권에 도장이 쿵 하고 찍히는 그 찰나의 긴장과 설렘. 버스 한 번으로 나라와 나라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경험은 그 자체로 신비로움이었다.

주말과 휴일을 이용하고, 때로는 고단한 일상에 쉼표를 찍듯 휴가를 얻어, 나는 자연스럽게 이웃 나라들로 발걸음을 옮겼다. 우간다의 초록 언덕을 지나고, 케냐의 광활한 평원을 달리고, 탄자니아의 바람을 맞았다.

이집트의 거대한 유적 앞에 서기도 했고, 짐바브웨와 잠비아를 가르는 대지의 물보라를 맞으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끝자락까지 닿았다. 지도 위에 점처럼 흩어져 있던 그 낯선 이름들이, 하나씩 내 두 발이 직접 딛고 지나온 온기 어린 자리로 바뀌어 갔다.

관광객이 아니라 ‘현지인‘의 호흡으로 걷던 여행

그 여정들은 패키지 투어의 유명 명소를 도장 찍듯 스쳐 지나가는 여행과는 결코 같을 수 없었다.

울퉁불퉁한 흙먼지를 날리는 현지 대중교통, 마타투나 모토바이크에 올라타기도 했고, 짐을 가득 실은 낡은 버스에 몸을 구겨 넣기도 했다.

왁자지껄한 로컬 시장에서는 귀를 간지럽히는 낯선 언어의 흥정 소리, 향신료와 흙먼지가 뒤섞인 대기의 냄새, 손짓 발짓으로 나누던 어설픈 대화들이 있었다.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소박한 마을의 나무 그늘 아래서 낯선 이들과 눈을 맞추고 손을 흔들었다.

그것은, 오직 그 땅에서 치열하게 살아본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특별하고 깊은 유대의 여행이었다.

페루 — 우아누코가 새로운 여행의 출발점이 되다

아프리카의 뜨거운 붉은 대지를 지나, 지금 나는 페루 우아누코(Huánuco)에 정착해 남미라는 또 다른 거대한 대륙의 숨결을 마주하고 있다.

장소는 바뀌었지만, ‘이곳에 살고 있기에’ 누릴 수 있는 설렘은 여전히 유효하다. 구름 사이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고대 석축 도시 마추픽추의 신비, 수억 년의 시간과 지층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낸 5천 고지 무지개 산 비니쿤카의 형형색색 능선, 눈이 시리도록 파란 안데스의 거대한 고산 호수의 정적 — 그 모든 풍경을 나는 이미 내 품에 안았다.

그리고 이제, 나는 페루를 넘어 남미 대륙 전체를 향한 새로운 지도를 펼치고 또 한 번의 거대한 발걸음을 조용히 준비하고 있다.

내가 얻은 것은, 새로운 여행지가 아니라 ‘사는 눈‘이었다

며칠 머물다 호텔로 돌아가는 이방인이 아니라, 그곳의 언어를 배우고 삶의 고단함을 견뎌내며 살아본 사람이기에 비로소 얻을 수 있는 시선이 있다.

같은 풍경을 보아도, 관광객은 카메라에 풍경을 담고 떠나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은 그 풍경 뒤에 숨은 사람들의 땀방울과, 그 땅이 품고 있는 시간의 결까지 고스란히 읽어낸다. 그것이 내가 두 대륙의 거친 품에서 건져 올린, 가장 값지고 유일한 보물이었다.

낯선 땅이 내게 건넨, 가장 눈부신 선물

처음에는 누군가를 돕고 봉사하기 위해 이 낯선 땅에 날아왔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내가 눈뜨고 숨 쉬는 그 삶의 터전 자체가 거대한 여행지가 되어 있었다. 낯선 곳에 뿌리를 내리자, 그 대륙이 여행지가 되었다.

어쩌면 이것이, 낯선 나라의 불편함과 외로움을 기꺼이 묵묵히 살아낸 사람에게 하늘이 허락한 특별한 선물인지도 모르겠다.

봉사자였고, 결국 여행자가 되었다.

나는 단지 대륙을 구경하러 떠돌던 여행자가 아니었다.

나는 그 한 대륙의 치열한 삶 속으로, 조금씩, 그러나 가장 깊숙이 걸어 들어갔던 것이다.

지도 위의 먼 이름이었던 두 대륙은, 어느새 내 발밑의 땅이 되어 있었다.

※ 한 편의 글에 그 넓고 찬란한 대륙의 기억을 다 담아내기란 애초부터 무리이다. 지평선 너머로 저물던 아프리카의 노을과 안데스의 만년설 아래 새겨둔 구체적인 여행 기록들은, 이제 다음 글들에서 하나씩 찬찬히 꺼내어 풀어놓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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