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하고 나서야 알았다.
직장을 떠나는 순간,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사회에서 잊힐 수 있다는 것을.
직장에 있을 때는 해야 할 일이 분명했고,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가진 경험과 판단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고,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더 이상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자유로웠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도 있었고, 시간도 많아졌다.
하지만 그저 편안함에 안주하며 남은 삶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이제 어디에서 쓰임 받을 수 있을까?’
다시 한번 내가 필요한 곳에서, 보람을 느끼며 살아보고 싶었다.
그래서 KOICA(코이카) 해외 봉사단에 지원했다.
그 선택이 내 인생의 후반전을 이렇게 바꾸어 놓을 줄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렇게 낯선 나라에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뜻밖의 사실을 깨달았다.
한국에서는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나의 경험들이, 이곳에서는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귀한 자산이 되었다는 것을.
내가 살아오며 배운 것들, 일터에서 쌓은 노하우, 사람들과 부딪치며 얻은 지혜.
그저, 지나간 세월이라 여겼던 것들이 낯선 땅에서는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진 경험이 필요한 곳을 그동안 아직 만나지 못했을 뿐이었구나.”
낯선 땅의 풍경은 어딘가 익숙했다. 이곳 사람들의 삶이 내가 어릴 적 살아온 시대의 모습과 참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의 나 역시 가난하거나 불편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더 나은 세상을 경험해보지 못했으니까.

그때 자연스럽게 몸에 밴 것들이 지금 이 낯선 땅에서 살아가는 나를 버티게 하는 단단한 힘이 되어 주었다.
참 이상한 일이다.
지나온 삶이 모두 잊힌 줄 알았는데, 도리어 그 경험들이 나를 다시 살아가게 하고 있다.
르완다에서 살았고, 아프리카 여러 나라를 여행했다. 그리고 지금은 페루의 정겨운 Campo(시골마을)인 우아누코(Huánuco)에서 살아가고 있다.

또다시 낯선 언어와 낯선 이들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런데 이제는 예전처럼 낯섦이 두렵지 않다.
이 땅에서 내가 누구인지 다시 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생의 2막은 지금까지의 삶을 내려놓고 새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온 삶이 가진 진정한 의미를 다시 발견해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살아본다.
낯선 땅에서.
다시, 나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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