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삶이 물어오고 마음이 건넨 말들

  • 세상과 잇던 탯줄이 끊어지던 날 — 르완다와 페루, 두 번의 도난

    세상과 잇던 탯줄이 끊어지던 날 — 르완다와 페루, 두 번의 도난

    르완다, 후예 — 손가락에서 낚아채인 것

    적도에 가까운 땅 르완다의 햇볕은 늘 강렬했다. 그 뜨거움이 한풀 꺾이는 오후 5시는 나의 어김없는 산책이자 러닝 타임이었다. 6개월이 넘도록 늘 다니던 익숙한 산책길. 작은 도시 후예(Huye)에서 동양인 여성인 나, 이른바 ‘무중구(Muzungu)’의 존재는 늘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나는 평소 누군가의 타깃이 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건은 여느 날과 다름없는 일요일 오후에 일어났다. 길옆 교회에서 쏟아져 나오는 인파로 거리가 북적였다.

    바로 그때였다. 허름한 차림에 슬리퍼를 질질 끌고 다가온 한 남자가 내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휴대폰을 사정없이 낚아챘다. 하지만 손가락의 고리에 걸려 휴대폰이 쉽게 빠지지 않자, 그는 나를 바닥에 밀쳐버리고는 손가락에서 억지로 폰을 빼내 들고 달아났다.

    “Help me!“

    목이 터져라 외쳐야 하는데 입술마저 열리지 않았다. 그 광경을 뻔히 지켜보던 인파 속에서, 한 신사가 나와 함께 그를 쫓아주었다. 하지만 남자는 슬리퍼마저 벗어 던지고 르완다의 언덕길을 타고 질주했다. 그리고 어디론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도망친 도둑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동안, 손발이 사정없이 떨렸고 입술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휴대폰이 없으니 누구에게도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근처에 살던 코이카 동료의 집 문을 두드렸다. 혹시 증거가 될까 싶어 도둑이 버리고 간 슬리퍼를 손에 든 채 횡설수설하는 나를 보고, 그는 나보다 더 당황했다.

    경찰서에서 돌아온 대답

    경찰의 태도는 미온적이었다. “삼성 폰이 정품이냐, 시리얼 넘버가 어떻게 되느냐.” 그제야 알았다. 중국산 가짜가 판치는 현지 사정도, 해외 나올 때는 기기의 시리얼 번호까지 메모해 두어야 한다는 철칙도.

    이어진 말은 더 절망적이었다. “절대로 르완다 내에서는 그 폰이 열리지 않을 겁니다. 국경을 넘어 가까운 콩고에서 켜질 가능성이 크지요.” 결국, 찾기는 어렵다는 결론이었다.

    신고를 마무리했고, 코이카 사무소에도 보고해야 했다. 안전 코디네이터와 현지인 담당이 후예 경찰서와 몇 차례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때 곁에서 나를 다독여준 동료 단원이 없었더라면, 그 아찔한 고립감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파견 전에 준비해 두었던 예비 폰을 연결하고서야, 나는 다시 세상과 이어질 수 있었다.

    이틀 후, 경찰서에서 문자가 날아왔다. 신용카드와 르완다 ID가 경찰서로 돌아왔다고. 하지만 폰은 없다는 소식이었다.

    현지 담당 코디네이터가 도둑을 계속 추적하겠냐고 물었다.

    순간 망설였다. 도둑을 찾아 벌을 받게 한들, 이 작은 시골 마을에서 외국인인 내가 그 후에 어떤 화를 입을지 알 수 없었다. “그만두겠다.”고 하자 “잘 생각했다.”는 속 편한 대답을 건넸다.

    보는 눈이 그렇게 많았고 그 작은 동네에서, 그들이 그 도둑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런데도 굳이 들추지 않는 것. 그것이 이곳 사람들이 자국민을 지키는 그들만의 방식이었을 것이다 —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짐작일 뿐이지만. 그 묘한 침묵 앞에서, 이방인으로서의 서글픈 무력감이 밀려왔다.

    후예는 그런 곳이었다. 버스터미널에서 모토를 타고 오는 길, 다른 전화를 받느라 목적지를 말해주지 않았는데도, 기사는 영락없이 내 집 앞에 나를 내려주었다.

    사실 그날은 다른 곳에 갈 약속이 있었는데도 말이다. 내가 누구이고 어디에 사는지가 이미 온 동네에 노출되어 있다는 뜻이다.

    어느 날은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하느라 길가 처마 밑에 섰다. 그곳에서 만난 양말 장수 여인이 이것저것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낯선 언어의 질문에 내가 당황해 멈춰 서 있자, 곁에서 함께 비를 피하던 우무뇬지(자전거 택시 기사)가 나서서 유창하게 내 신상을 털어놓았다.

    “저 사람은 CJSM 학교에서 일하고, 집은 저기야.”

    등골이 서늘해졌다. 나의 일거수일투족이 이 작은 도시의 투명한 유리알처럼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 그 순간, 언제든 범죄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공포가 엄습했다.

    페루, 다시 찾아온 같은 질문

    그런데, 삶은 가끔 아주 비슷한 질문을 전혀 다른 장소에서 다시 던지곤 한다. 페루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한 번 데었으니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줄 알았다. 페루 우아누코의 토요 시장에서 장을 보고 짐이 가벼워 버스를 탔다. 집 앞에 내려 가방을 확인하는 순간, 휴대폰이 사라졌다는 걸 알았다.

    휴대폰 안에는 연락처, 수많은 사진, 일상의 지도, 은행 계좌, 번역기, 인터넷, 그리고 현지 사람들과 이어지는 선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휴대폰을 잃는다는 건, 단순히 비싼 물건 하나를 분실하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낯선 땅에서 나를 세상과 이어주던 유일한 창 하나가, 소리 없이 닫히는 일이었다.

    르완다 때와는 달랐다. 집에 돌아와 노트북의 메신저 창을 열어 동료 단원에게 도움을 청했다. 야무진 그 동료는 먼저 아이폰 찾기부터 설정하고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기기는 이미 전원이 꺼진 뒤였다.

    코이카 페루 사무소에 연락하자 공식적인 경찰 신고를 권했다. 그 안내에 따라, 나는 평소 친분이 두터운 코워커와 기관장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들이 기꺼이 함께 경찰서로 동행해주었다.

    한국의 신속하고 체계적인 시스템과는 사뭇 다른, 페루 특유의 느긋한 속도와 처리 과정은 속이 탈 만큼 답답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진심을 다해 도와주려 애쓰는 마음이 전해졌다. 여러 장의 조서가 만들어졌고, 그 서류를 들고 클라로(Claro) 대리점에 달려가 예비 폰을 개통했다.

    그 순간에도 생각했다. 곁에서 도와준 동료가 없었더라면, 인터넷이라는 비상구가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연결이 끊어진다는 것

    결국, 두 나라에서 모두 휴대폰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내가 잃어버린 것은, 휴대폰만이 아니었다. 휴대폰 하나가 사라지는 순간, 세상과 나를 잇던 탯줄 같은 끈 하나가 통째로 끊어진 것 같았다.

    휴대전화와 인터넷 공간은 이방인에게 단순한 편의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거친 대지를 항해하는 지도이자 언어이고, 모국인 한국과 연결된 유일한 생명줄이다. 그것을 통째로 빼앗겼을 때 엄습하는 눈앞이 캄캄한 막막함을 누가 알겠는가.

    비로소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낯선 땅에서 내가 얼마나 많은 보이지 않는 선에 의지해 하루하루를 숨 쉬고 있었는지를.

    이 아찔한 소동을 지나며, 낯선 환경에 대처하는 또 하나 비장한 나만의 생존 노하우를 장착했다.

    “이런 일마저도, 훗날에는 웃으며 추억할 수 있겠지.“

    지구 반대편 우아누코에서의 삶은, 오늘도 그렇게 거친 바람을 맞으며 한 뼘 더 유연해지고 있었다.

  • 이방인이 앓는 밤 — 혼자 견뎌야 했던 시간들의 외로움

    이방인이 앓는 밤 — 혼자 견뎌야 했던 시간들의 외로움

    이방인이 앓는 밤

    KOICA 봉사자로서 나는 늘 씩씩하고 밝은 사람으로 비쳤을지 모른다.

    하지만 낯선 땅에서의 삶이 어찌 매 순간 축제일 수만 있을까. 특히 몸이 아픈 날이면, 홀로 앓아누워 흘려야 했던 눈물 속에서 생각보다 훨씬 깊은 외로움이 밀려왔다.

    아픈 몸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곁에 기댈 곳이 없다는 막막함이었다. 르완다에서는 아메바성 장염을 몇 번이고 앓았고, 페루에서는 오른팔이 불쑥 빠져버리는 사고를 겪었다. 몸이 무너져 내릴 때면 마음의 성벽도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그 순간, 나는 어쩔 수 없는 한 사람의 외로운 이방인이었다.

    르완다, 후예(Huye) — 아메바와의 첫 싸움

    2018년부터 2020년 3월까지, 나는 르완다의 작은 도시 후예(Huye)에서 살았다. 청각장애 학교인 CJSM 이 나의 삶터였다.

    활동 연장을 위해 코이카의 절차에 따라 건강검진을 받았다. 그리고 결과지를 받아 들었을 때, 믿기 어려운 결과가 나왔다. 아메바균 양성. 아무 증상도 느끼지 못했기에, 믿고 싶지 않았다.

    같은 학교에서 활동하던 JICA 단원이 그 병으로 고생하는 것을 보아왔기에 그 지독한 고통을 잘 알고 있었다. 면역력이 떨어지면 언제든 고개를 드는 병이었다. 연장 승인의 절대 조건은 오직 ‘단원의 건강’이었기에, 본부에서는 엄격한 치료 증빙을 요구했다.

    처방받은 약의 독성은 마치 항암 치료를 받는 것과 같았다.

    침대 난간을 붙들고 뒹굴며 견뎌야 하는 시간들이었다.

    속이 뒤집히고, 먹은 것을 전부 토해내는 고통 속에서, 불현듯 서글픈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선교사라면 이 땅에서 세상을 떠나는 것을 순교라 하겠지만, 봉사자가 이 낯선 땅에서 아프다 죽으면 과연 무엇이라 부를까. 나는 과연 한국 땅에 묻힐 수 있을까.’

    가족들의 얼굴이 차례로 스쳐 지나가던, 잠 못 이루던 밤들의 서늘한 공기가 아직도 생생하다. 원인은 청각장애 학생들에게 수영을 가르치다 피치 못하게 입으로 들어간 물 때문이었을 것이다.

    키갈리(Kigali), 레메라(Remera) 보건소 — 반복된 장염

    3년 뒤, 나는 르완다의 수도 키갈리에 있는 레메라 보건소로 재파견되었다. 그곳에서 다시 두 번의 장염을 앓았다. 아마도 날것의 채소가 원인이었을 터라, 외식은 철저히 피했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식탁의 음식을 먹어도, 늘 다른 사람들은 멀쩡하고 나만 앓아누웠다.

    아픈 배를 움켜쥔 채 채변을 해 들고 보건소로 향하던 발걸음. 한 시간 뒤 밝혀진 결과는 역시나 아메바였다. 다행히 내 활동 기관이었기에 보건소장이 직접 나서 빠른 조치와 처방을 도와주었지만, 정작 그들은 심각한 나를 보며 “괜찮아질 거야”라며 해맑게 웃고 있었다. 그들에게 아메바성 장염은 일상의 흔한 풍경이었던 것이다.

    아플 때는 온 세상이 캄캄해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독한 약효로 겨우 정신이 돌아왔을 때 비로소 깨닫게 된다. 곁에서 무심한 듯 손을 내밀어 주던 현지 사람들이 얼마나 고마운 존재였는지를.

    페루, 두 번 빠진 오른쪽 팔

    지금 살고 있는 페루 우아누코에서는, 팔이 두 번이나 빠지는 아찔한 일을 겪었다. 한 번은 곁에 있던 단원이 급히 당겨 맞춰 주었고, 또 한 번은 팔을 부여잡은 채 모토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달리던 중 도로의 거친 둔턱을 넘는 충격 덕분에 팔이 제자리로 툭 돌아오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병원. 페루 ID를 버젓이 가지고 있음에도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접수가 지체되었다. 기관장에게 연락해 신분확인을 마치고 나서야, 접수가 이루어졌다.

    의사 앞에 앉은 나는, 열악한 병원 환경을 마주하자 오히려 치료받기 두려워지는 마음이 엄습했다. 썩 좋아 보이지 않는 위생 상태에 오히려 병균을 얻어올까 겁이 났다. 다행히 팔은 스스로 제자리를 찾아 별다른 처치는 면했지만, 그 와중에도 한걸음에 병원으로 달려와 준 기관장의 모습은 거친 모래밭 속의 샘물처럼 깊은 안도를 안겨주었다.

    낯선 땅에서 아프다는 것은 이토록 두려운 일이었다. 국토가 작아 서너 시간이면 수도 키갈리에 닿던 르완다와는 달리, 페루는 그야말로 다른 세계였다. 우아누코에서 리마까지 버스로 8~9시간, 비행기로도 1시간이 걸리는 거대한 땅. 응급 상황을 떠올리면 아찔한 공포가 밀려온다. 아프지 말아야지, 조심하고 또 조심하지만 이 광활한 자연과 일상의 변수를 어찌 다 피해갈 수 있겠는가.

    혼자 남겨진 계절

    우아누코의 동료 단원들이 하나둘 활동을 마치고 떠났다. 함께 페루 땅을 밟았던 동기들도 모두 짐을 쌌다. 1년을 연장한 나만 홀로 남겨진 텅 빈 자리. 비록 평소에도 각자의 자리에서 바빠 자주 만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지척에 한국어로 온기를 나눌 이가 없다는 사실이 새삼 서럽고 가슴을 저리게 했다.

    내 마음을 아는 듯, 새벽까지 유난히 거칠게 내리던 빗소리에, 그만 맘 놓고 울었다.

    단단해지는 시간

    아팠다. 몸도, 마음도.

    당황스러웠고, 서러워 눈물도 흘렸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 모든 생채기의 시간을 지나고 나니, 나는 어느새 조금 더 단단한 결을 지니고 있었다.

    낯선 땅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혼자서 모든 것을 악물고 견뎌내는 일이 아니었다. 도움이 필요할 때, 누군가에게 기꺼이 손을 내미는 법을 배워가는 다정한 과정이었다.

    우아누코에서 허락된 남은 1년.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1년처럼, 하루하루를 온 마음을 다해 살아내리라.

  • 낯선 땅 — 은퇴 후 다시 낯선 나라에 살다

    낯선 땅 — 은퇴 후 다시 낯선 나라에 살다

    은퇴하고 나서야 알았다.

    직장을 떠나는 순간,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사회에서 잊힐 수 있다는 것을.

    직장에 있을 때는 해야 할 일이 분명했고,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가진 경험과 판단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고,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더 이상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자유로웠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도 있었고, 시간도 많아졌다.

    하지만 그저 편안함에 안주하며 남은 삶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이제 어디에서 쓰임 받을 수 있을까?’

    다시 한번 내가 필요한 곳에서, 보람을 느끼며 살아보고 싶었다.

    그래서 KOICA(코이카) 해외 봉사단에 지원했다.

    그 선택이 내 인생의 후반전을 이렇게 바꾸어 놓을 줄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렇게 낯선 나라에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뜻밖의 사실을 깨달았다.

    한국에서는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나의 경험들이, 이곳에서는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귀한 자산이 되었다는 것을.

    내가 살아오며 배운 것들, 일터에서 쌓은 노하우, 사람들과 부딪치며 얻은 지혜.

    그저, 지나간 세월이라 여겼던 것들이 낯선 땅에서는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진 경험이 필요한 곳을 그동안 아직 만나지 못했을 뿐이었구나.”

    낯선 땅의 풍경은 어딘가 익숙했다. 이곳 사람들의 삶이 내가 어릴 적 살아온 시대의 모습과 참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의 나 역시 가난하거나 불편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더 나은 세상을 경험해보지 못했으니까.

    그때 자연스럽게 몸에 밴 것들이 지금 이 낯선 땅에서 살아가는 나를 버티게 하는 단단한 힘이 되어 주었다.

    참 이상한 일이다.

    지나온 삶이 모두 잊힌 줄 알았는데, 도리어 그 경험들이 나를 다시 살아가게 하고 있다.

    르완다에서 살았고, 아프리카 여러 나라를 여행했다. 그리고 지금은 페루의 정겨운 Campo(시골마을)인 우아누코(Huánuco)에서 살아가고 있다.

    또다시 낯선 언어와 낯선 이들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런데 이제는 예전처럼 낯섦이 두렵지 않다.

    이 땅에서 내가 누구인지 다시 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생의 2막은 지금까지의 삶을 내려놓고 새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온 삶이 가진 진정한 의미를 다시 발견해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살아본다.

    낯선 땅에서.

    다시, 나답게.

  • 바람의 딸을 꿈꾸던 소녀, 60에 낯선 땅에 서다

    바람의 딸을 꿈꾸던 소녀, 60에 낯선 땅에 서다

    평범함이라는 가장 강력한 무기

    가슴 한구석에 꼬깃꼬깃 접어두었던 지도 한 장이 있었다. 젊은 날, 나의 청춘은 뜨거웠고 마음 한편은 늘 세상을 향한 발걸음을 갈망했다. 당대 청년들의 마음을 흔들었던 종군 기자 이진숙의 기록과 ‘바람의 딸’ 한비야의 책장을 넘길 때마다 가슴이 뛰었다. ‘언젠가는 나도 저 너머의 세계로 떠나게 될 거야.’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품었던 그 꿈은 그러나, 일상이라는 거대한 현실과 치열한 직장생활의 무게에 밀려 서서히 묻혀갔다.

    오랜 세월이 흘러 은퇴라는 이름표를 달았을 때, 잊고 살았던 그 불씨가 불쑥 고개를 들었다. 첫 번째 낯선 땅이었던 르완다에서 온몸으로 부딪히며 모든 소명을 다 쏟아부었다고 생각했다. 한국으로 돌아와 익숙한 삶의 평온한 울타리 안에서 여유를 누릴 줄 알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마음 깊은 곳의 불씨는 죽은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 깊은 곳에서 또다시 떠나고 싶다는 뜨거운 충동이 솟구쳤다. 일상의 안일함이 길게 이어질수록, 오히려 내 안의 세포들은 더 거칠고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던 그 대지를 그리웠다. 르완다에서의 경험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의 서막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다시 짐을 꾸렸다. 이번에는 아프리카가 아니었다. 남미였다. 지구 반대편의 거친 대지, 페루였다.

    그렇게 인생 2막의 두 번째 낯선 땅이 시작되었다. 처음 페루 안데스의 정기가 흐르는 우아누코 땅에 발을 디뎠을 때의 공기를 기억한다.

    영어가 거의 통하지 않는 곳.

    온통 스페인어뿐인 그 거대한 대지 위에서 내가 아는 단어라곤 기초적인 몇 마디가 전부였다. ‘소통이 안 되는 이 낯선 도시에서, 과연 내가 살아갈 수 있을까?’ 막막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사방이 산맥으로 둘러싸인 낯선 대지 앞에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자괴감이 밀려들었다. 현지에 도착해 마주한 세계는 너무나 넓고 찬란했다. 그 찬란한 국제적인 환경 속에서 홀로 빛을 잃은 듯 작아진 나를 발견했다.

    ‘나는 그동안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았구나. 왜 더 일찍 이 넓은 세상으로 떠나오지 못했을까.’ 그저 평범하게 살아왔던 삶이 후회스러웠다.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만 같아 작아지고 초조해지는 날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 절망의 바닥을 지나면서, 뜻밖의 깨달음이 찾아왔다. 시간이 흐르고 흙먼지 날리는 우아누코의 일상에 스며들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통째로 뒤집히기 시작했다. 가난을 느끼는 기준이 변했다.

    화려한 편의와 많은 소유가 없어도, 가진 것 안에서 스스로 밥을 지어 먹고 안데스의 거친 고원의 산세를 두 발로 묵묵히 걷는 일상만으로도 삶은 꽤 괜찮게 흘러갔다.

    내 손으로 하루를 꾸려가는 충만함이 차올랐다.

    그때 비로소 뼈저리게 깨달았다. ‘내 삶의 질은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구나.’

    이 단단한 생각의 뼈대가 세워지자 신기하게도 외부의 시선이나 결핍감은 더 이상 나를 흔들지 못했다. 물론 언젠가 한국으로 돌아가면, 세상은 여전히 그들만의 속도와 잣대로 나를 평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관없다. 이 낯선 땅에서 온몸으로 부딪히며 얻어낸 생존 감각은, 세상을 더 깊고 넓게 품을 수 있는 가장 귀한 자양분이 되었으니까.

    문득 이런 생각이 스친다. 지구 반대편의 낯선 도시 한복판, 혹은 무인도에 툭 던져진다 해도, 이제 나에게는 나만의 방식으로 일상을 재건할 가장 강력한 무기가 생겼다. 거창한 무언가가 아니라, 스스로 살아내는 이 단단한 내면 말이다.

    그리고, 세상의 풍파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나를 지탱해 주는 힘이 바로 그 평범함에 있다는 것을 이 거친 대지에서 배웠다. ‘평범하게 산다는 게 가장 어렵다’던 어른들의 그 깊은 뜻을, 비로소 지구 반대편의 흙먼지 속에서 온몸으로 통과해 낸다.

    두 번째 낯선 땅, 페루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오늘도 나는 그 평범하고도 단단한 온기와 나다운 속도로 살아내고 있다.

  • “Corea!” 말을 잃어버린 자리에서 만난 온기

    “Corea!” 말을 잃어버린 자리에서 만난 온기

    말이 통하지 않는 땅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어지간한 정신 체력으로는 버티기 어려운 일이다. 세계를 떠돌다 보면 ‘0개 국어가 된다’는 농담 같은 진실을 매 순간 마주하게 된다. 영어가 온전하지 못한 상황에서 르완다의 키냐르완다어를 거쳐 페루의 스페인어까지 부딪히다 보니, 이제는 외국어는커녕 모국어인 한국어마저 혀끝에서 맴돌다 툭툭 끊기기 일쑤다.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는데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해 머뭇거리고 있으면, 도리어 현지인들이 먼저 내 마음을 읽고 다가와 묻고 대답해 준다. 그 다정한 눈빛과 서툰 배려야말로 언어를 뛰어넘는 가장 뜨거운 마음의 언어가 아닐까.

    며칠 전, 우아누코 각 지역에서 모인 특산물 홍보 축제가 열렸다. 우리 사무소도 부스를 마련해 국제부의 활동을 알리고 있었다.

    우아누코의 질 좋은 커피를 세계로 수출하고, 장학제도를 연결하는 소중한 일들을 소개하는 자리였다.

    축제의 열기가 무르익어 갈 무렵, 생각지도 못한 일격이 날아들었다. MC는 당연히 외국인인 나도 현지 언어를 구사할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무대 위를 휘젓던 MC가 갑자기 Extrangera 인 나를 불쑥 호명했다. 엉겹결에 마이크를 건네받은 것이다.

    도대체 내게 이런 순서가 돌아올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겨우 내 소개까지는 마쳤는데, 당황한 나머지 그나마 머릿속에 남아 있던 스페인어 단어들은 궤도를 잃은 채 사정없이 흩어져 버렸다. 다음 문장을 어떻게 이어야 할지 아득한 공백이 밀려온 순간,

    ‘내 나라 말이 있잖아’.

    이 빛나는 지혜로 결국 내 생의 가장 깊은 언어인 한국어로 입을 떼기 시작했다.

    “…….”

    순간 객석에서 뜻밖의 환호가 터져 나왔다.

    “Corea! 코레아!”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이내 흥겨운 박수 소리가 축제장을 채웠다.

    아찔했던 위기의 순간은 그렇게 믿기 힘든 온기로 채워졌다. 그들의 따뜻한 시선과 격려 속에서, 문득 ‘내가 참 멀리도 와서, 이렇게 한국을 알리고 있구나’ 하는 뭉클한 자부심이 밀려왔다. 그동안 낯선 언어와 환경에 눌려 한없이 위축되어 있던 마음의 평정이 비로소 단단하게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언어가 유창해서 이 거친 대지를 살아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서툴고 부족했기에, 그들이 먼저 손을 내밀어 마음을 모아 도와주었던 것이다. 그렇게 좌충우돌 부딪히며 살아내다 보니, 어느새 까마득하던 이 낯선 도시의 하루가 고스란히 내 삶이 되어 스며들어 있다.

    오늘도 나는 그들의 다정한 온기 속에서 하루를 배우고, 말 대신 마음으로 건네는 삶의 지혜를 선물 받는다. 날마다 깊어지는 일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