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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외 봉사자의 여행] 밤마다 지구 반대편의 좌표를 뒤지는 이유 – 여행은 지도를 오가는 고요한 밤부터 시작된다

    [해외 봉사자의 여행] 밤마다 지구 반대편의 좌표를 뒤지는 이유 – 여행은 지도를 오가는 고요한 밤부터 시작된다

    밤이 깊을수록 선명해지는 남미의 지도

    어둠이 내린 방, 컴퓨터 모니터의 푸른 빛만이 책상 위를 은은하게 비춘다. 모니터 화면에는 남미 대륙의 거대한 지도와 수없이 많은 항공권 검색 창이 줄지어 열려 있다.

    12월, 홀로 떠날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이과수 폭포, 그리고 리우데자네이루의 붉은 노을을 그려본다. 이어지는 2월, 마음 맞는 이들과 함께 페루를 출발해 남미의 깊은 속살을 엮어낼 긴 여정까지.

    특히 2월 여정은 처음 뜻을 모든 다른 지역 코이카 단원과 동행한다. 나보다 다섯 살이나 많은 인생의 선배이지만, 낯선 대륙에서 함께 걸을 동행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해진다. 게다가 홀로 여행할 때보다 경비를 꽤 아낄 수 있으니 이보다 더 고마운 조합이 어디 있을까.

    누군가는 이 나이에 왜 사서 고생을 하느냐고, 편안한 패키지 여행을 두고 왜 머리를 싸매느냐고 묻곤 한다. 하지만 나는 밤마다 화면 속에서 도시와 도시를 선으로 잇고, 시간을 조각하는 이 순간이 참 좋다. 가보지 않은 낯선 거리의 이름을 나지막이 읊조리다 보면, 내 마음은 이미 지구 반대편의 바람 속에 가 닿아 있다. 여행은 비행기에 몸을 싣는 순간이 아니라, 바로 이 고요하고 설레는 밤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길을 짜는 사람만이 갖는 머릿속 지형도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예약한다는 것은 벅찬 설렘인 동시에 묵직한 책임이다. 항공 시간표를 몇 번씩 뒤엎고, 도시마다 안전하고 따뜻한 잠자리를 찾아 여러 숙박 사이트 창을 밤새 열고 닫는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버스 편을 확인하고, 언어도 잘 통하지 않는 낯선 땅의 예약 시스템과 씨름을 이어간다.

    그렇게 며칠 밤을 지새우다 보면 문득 가슴 한구석이 뻐근해지는 신기한 일이 생긴다. 아직 가보지도 않은 낯선 도시의 골목길, 환승역의 계단, 모퉁이를 돌면 나타날 작은 광장의 풍경까지… 어느새 내 머릿속에 하나의 또렷한 지도로 살아 숨 쉰다. 내 손으로 직접 찾고, 고민하고, 길을 만들어 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머릿속의 지도다.

    물론 그 길 위에는 늘 뜻하지 않은 파도가 친다. 아르헨티나 항공에서 리마 출발 비행기가 결항 되었다며 하루를 당기라는 무심한 메일이 날아왔을 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렵게 맞춰둔 일정 전체가 도미노처럼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진땀을 흘리며 취소 환불을 신청하고 라탐 항공의 대체 편을 찾아 다시 결제하기까지, 내내 마음을 졸였다.

    그뿐인가. 2월 푸노 카니발을 위해 일찍이 예약해 둔 숙소에서는 “축제 대목이라 손해가 크니 며칠 더 묵든지, 아니면 에어비앤비 앱에서 당신이 직접 취소하라”는 황당하고 배짱 두둑한 통보가 날아오기도 했다. 처음엔 화도 나고 억울했지만, 1년 중 가장 큰 축제 대목 하나만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현지 숙소 주인들의 사정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갔다. 이방인으로서 겪어야 할 소동을 다스리며 앱 고객센터를 통해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문제를 풀어냈다. 이 모든 좌충우돌과 머리를 싸매는 밤들조차,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 찬란한 과정이다.

    ▣ [Yesook’s Travel Tip] 낯선 길 위에서 나를 지키는 예약 노하우

    ⚪ 항공 검색은 ‘구글 플라이트‘ 다구간으로, 결제는 ‘항공사 공식 홈페이지‘에서: 스카이스캐너나 트립닷컴 등도 참고하지만, 구글 플라이트(Google Flights)에서 최적의 다구간 노선을 확인한 뒤 항공사 공식 사이트에서 직접 예매하면 대체로 저렴하고, 결항이나 변경 시 대처도 가장 깔끔하다.

    ⚪ 숙소 소통은 반드시 ‘자체 플랫폼 앱 메시지‘로: 예약 취소 요구나 금전적 분쟁이 생겼을 때 개인 왓츠앱(WhatsApp)으로 나눈 대화는 플랫폼이 확인하기 어려워 보호를 받기 힘들다. 에어비앤비나 아고다 등 해당 예약 앱 안의 메시지 기능을 이용해야 플랫폼의 공식적인 보호와 환불 처리를 받을 수 있다.

    코이카 단원만이 누릴 수 있는 유쾌한 특권

    사실 내가 이렇게 다시 배낭을 꾸리는 데는 아주 현실적이면서도 특별한 이유가 있다.

    한국에서 작정하고 남미 여행을 오려면 항공권과 일정까지 천만 원이 훌쩍 넘는 큰돈과 거창한 결심이 필요하다. 하지만 나는 지금 지구 반대편, 남미의 한복판 페루에 살고 있지 않은가! 르완다에 봉사단원으로 머물던 시절 “아프리카에 왔으니 이 거대한 대륙의 속살은 꼭 눈에 담아봐야지!” 하고 길을 떠났던 것처럼, 페루에 있는 지금 남미 대륙을 품어보지 않는다면 두고두고 아쉬울 것 같았다.

    그렇다고 기관에서 여행 비용을 대주는 것은 절대 아니다. 주어진 생활비를 아끼고 아껴 만드는 ‘알뜰한 짠물 여행’이지만, 현지라는 거점에 서서 남미 각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표를 끊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낯선 땅에서 땀 흘리는 코이카 봉사자로서 누릴 수 있는 가장 근사하고 유쾌한 특권이 아닐까.

    욕심을 비워낸 자리에 채워진 다른 여행의 결

    돌아보면 젊은 날의 여행은 욕심이고 조바심이었다. 하나라도 더 봐야 한다는 강박에 세상을 마구 들이켰고, 밤차에 몸을 싣고 도미토리의 삐걱거리는 2층 침대에서 잠을 청해도 젊음이라는 밑천이 있었기에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60대에 접어든 지금, 내 여행의 기준은 부드럽게 결을 달리한다.

    ⚪ 얼마나 많은 곳을 찍고 오느냐보다, 얼마나 내 호흡대로 깊이 숨 쉬며 걸을 수 있는가를 먼저 생각한다.

    ⚪ 몸을 혹사하는 낡은 도미토리 대신, 지친 하루의 피로를 안온하게 녹여줄 작고 편안한 숙소를 찾는다.

    ⚪ 아끼되, 몸을 갉아 먹는 절약은 하지 않는다. 몇 푼 아끼려고 고단한 환승을 거치는 표보다는, 내 체력과 시간을 아껴주는 다정한 동선을 먼저 따져본다.

    ⚪ 유명한 명소 앞에서 남기는 인증사진보다, 그곳의 햇살과 바람 속에서 내가 무엇을 느끼며 조용히 익어가는지를 들여다본다.

    세상을 향한 호기심이 줄어든 것이 아니다. 내 몸의 한계와 시간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한 걸음 한 걸음을 더 깊고 단단하게 대하게 된 것뿐이다. 챙겨야 할 계산과 변수는 늘어났지만, 낯선 세상을 향해 쿵쿵 뛰는 내 가슴의 온도만큼은 청춘의 그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멈추지 않는 한, 인생의 지평선은 계속 넓어진다

    은퇴는 내 삶의 뒷전으로 물러나 멈춰 서는 시간이 아니다. 타인이 그려준 궤적을 벗어나, 내가 진정으로 갈망하던 삶의 지도를 내 손으로 직접 그려나가는 가장 자유로운 시작이다.

    이 나이에도 새로운 기술을 익히고, 낯선 나라의 비행기 표를 비교하며, 지구 반대편의 이웃들과 삶을 나누고 글을 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여행이 끝난 자리에서 또다시 다음 여행을 꿈꾸며 눈을 반짝일 수 있다는 것. 참 감사하고 눈부신 일이다.

    문득 스스로에게 나지막이 물어본다.’나는 과연 언제까지 이렇게 배낭을 메고 낯선 땅의 좌표를 찾아 헤맬 수 있을까?‘

    그러나 그 질문 끝에 굳이 답을 달아두지는 않으려 한다. 다만 분명한 것은, 아직도 내 가슴을 뛰게 만드는 여행지가 저 너머에 수없이 남아 있고, 비행기 표를 검색하는 이 밤의 설렘이 여전히 내 삶을 뜨겁게 적시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 삶의 지평선은 끊임없이 넓어지고 있다. 나는 오늘도 설레는 마음으로, 내 앞에 놓인 다음 지도를 가만히 펼쳐 든다.

  • [코이카 해외 봉사] 낯선 땅 — 은퇴 후 다시 낯선 나라에 살다

    [코이카 해외 봉사] 낯선 땅 — 은퇴 후 다시 낯선 나라에 살다

    은퇴하고 나서야 알았다.

    직장을 떠나는 순간,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사회에서 잊힐 수 있다는 것을.

    직장에 있을 때는 해야 할 일이 분명했고,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가진 경험과 판단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고,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더 이상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자유로웠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도 있었고, 시간도 많아졌다.

    하지만 그저 편안함에 안주하며 남은 삶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이제 어디에서 쓰임 받을 수 있을까?’

    다시 한번 내가 필요한 곳에서, 보람을 느끼며 살아보고 싶었다.

    그래서 KOICA(코이카) 해외 봉사단에 지원했다.

    그 선택이 내 인생의 후반전을 이렇게 바꾸어 놓을 줄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렇게 낯선 나라에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뜻밖의 사실을 깨달았다.

    한국에서는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나의 경험들이, 이곳에서는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귀한 자산이 되었다는 것을.

    내가 살아오며 배운 것들, 일터에서 쌓은 노하우, 사람들과 부딪치며 얻은 지혜.

    그저, 지나간 세월이라 여겼던 것들이 낯선 땅에서는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진 경험이 필요한 곳을 그동안 아직 만나지 못했을 뿐이었구나.”

    낯선 땅의 풍경은 어딘가 익숙했다. 이곳 사람들의 삶이 내가 어릴 적 살아온 시대의 모습과 참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의 나 역시 가난하거나 불편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더 나은 세상을 경험해보지 못했으니까.

    그때 자연스럽게 몸에 밴 것들이 지금 이 낯선 땅에서 살아가는 나를 버티게 하는 단단한 힘이 되어 주었다.

    참 이상한 일이다.

    지나온 삶이 모두 잊힌 줄 알았는데, 도리어 그 경험들이 나를 다시 살아가게 하고 있다.

    르완다에서 살았고, 아프리카 여러 나라를 여행했다. 그리고 지금은 페루의 정겨운 Campo(시골마을)인 우아누코(Huánuco)에서 살아가고 있다.

    또다시 낯선 언어와 낯선 이들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런데 이제는 예전처럼 낯섦이 두렵지 않다.

    이 땅에서 내가 누구인지 다시 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생의 2막은 지금까지의 삶을 내려놓고 새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온 삶이 가진 진정한 의미를 다시 발견해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살아본다.

    낯선 땅에서.

    다시, 나답게.

  • [해외 봉사] 다시 르완다로 — 우유 한 봉지에 담긴 생명의 무게, 그리고 삶의 절박함

    [해외 봉사] 다시 르완다로 — 우유 한 봉지에 담긴 생명의 무게, 그리고 삶의 절박함

    르완다의 붉은 땅, 가슴 아린 삶의 조각들

    코로나라는 거센 풍랑 속에서, 마치 전쟁터 같던 키갈리 공항을 떠나온 지 2년 5개월. 팬데믹의 긴 터널을 지나 내가 다시 도착한 르완다의 수도 키갈리는 예전과 달랐다. 맑고 청명했던 하늘은 자욱한 공해로 흐려져 있었고, 길거리를 가득 메운 모토택시들은 거친 경적을 울리며 숨 가쁘게 도로를 메우고 있었다.

    지원받은 주거비에 맞춰 어렵게 구한 집은 바퀴벌레의 온상이었고, 매일 아침이면 벽을 타고 오르내리는 도마뱀이 낯선 이방인을 반겼다. 익숙함은 사라지고, 더욱 험난해진 현실이 나를 먼저 맞이했다.

    내가 배치된 곳은 레메라 보건소, 이곳은 가난과 질병의 그늘이 가장 짙게 드리워진 곳이었다. 매일 보건소 마당에는 끝도 없이 길게 늘어선 사람들의 줄이 이어졌다.

    이름만 입력하면 모든 정보가 나오는 한국의 전산시스템과 달리, 수많은 종이 파일 속에서 일일이 환자 카드를 찾고 손으로 기록을 남겨야 했다.

    보건소를 찾는 환자들의 대부분은 AIDS 환자들이었다. 병의 경중에 따라 30일 또는 60일에 한 번씩 약을 받으러 찾아왔다. 놀랍게도 그들은 자신의 질병을 담담하게, 때로는 밝은 표정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밝은 얼굴 뒤에는 늘 서늘한 두려움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면역력이 떨어진 그들에게 폐질환 같은 합병증이 찾아오는 날은 곧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평소 유쾌하게 인사를 건네던 30대의 한 환자가, 그날따라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한 채 서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내 가슴은 덜컥 내려앉았다.

    나의 주요 직무는 영양실조 파트였다. AIDS 가정과 영양실조 아동들을 발굴하고, 일주일에 한 번 우유나 영양식을 나눠주는 일이었다.

    그러나 따뜻한 시선만으로는 품어내기 힘든, 가슴 시린 현실의 벽에 부딪히는 날들이 많았다. 기부로 들어오는 우유는 유통기한이 없었기에, 부정 유통을 막기 위해 우리는 지난주에 나눠준 빈 우유 봉투를 일일이 회수하여 확인했다. 이를 저렴하게 재래시장에 파는 이들이 있었고, 어떤 이들은 봉투 수량을 채우려 길거리에 버려진 더러운 빈 봉투를 주워 오기도 했다.

    어느 날, 영양식이 전면 중단될 위기에 처했던 20대의 어린 엄마, 나는 보건소 한쪽 구석에서 어깨를 들썩인 채 울고 있던 그 엄마를 마주했다. 붉어진 눈시울로 그녀의 손을 잡고 물었을 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나를 깊은 충격에 빠뜨렸다.

    “우유는 내 아이 한 명의 배를 채우지만, 그 우유를 팔아 감자를 사면 우리 온 가족이 굶지 않고 며칠을 버틸 수 있어요…”

    우리가 생각했던 ‘영양’과 그들이 살아내는 ‘생존’의 기준은 너무나 달랐다. 한국에서 챙겨온 여분의 옷을 건네주어도 그들은 입지 않고 시장에 나가 팔았다. 당장의 하루를 살아내야 하는 그들에게 옷과 우유는 단순한 생활용품이 아닌, 가족의 생계를 잇는 유일한 화폐였던 것이다. 비난할 수도, 탓할 수도 없는 그들의 일상이 내 마음에 묵직한 돌덩이 하나를 얹어놓았다.

    그렇게 그들의 삶 속으로 깊숙이 들어간 지 1년. 나는 지역주민들의 기초 보건의료체계를 바꾸는 현장사업에 착수했다. 모성 사망률을 낮추기 위한 의료장비를 도입하고, 땔감 연기와 강렬한 태양 때문에 눈이 상한 주민들을 위해 안과 장비를 갖추었다.

    무엇보다 환자들이 뙤약볕 아래서 무한정 기다려야 했던 그 길고 길었던 줄을 줄여주기 위해, 접수부터 결제까지 이어지는 온라인 전산 환경을 구축했다.

    새로운 방식을 받아들이는 것조차 쉽지 않았던 현지 직원들 사이에서, 아들처럼 영리하고 유능한 젊은 보건소장이 큰 힘이 되어주었다. 그가 없었다면 결코 해내지 못했을 일이다.

    악명 높은 ‘르완다 타임’을 극복하고 마침내 첫 온라인 전산 접수가 이루어지던 날, 보건소 앞마당의 줄은 눈에 띄게 줄어들어 있었다.

    돌아보면 그 낯선 땅에서 내가 건넨 것은 한 팩의 우유와 새로운 장비였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나에게 건넨 것은 삶의 절박함과 그 안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생명의 무게였다.

    떠나보니 비로소 보이는 것들. 르완다의 붉은 땅에서, 나는 오늘도 그 소중하고 아린 삶의 조각들을 하나씩 가슴에 담아 기록한다.

  • [코이카 해외 봉사] 내가 다시 낯선 나라로 떠난 이유 — 얼떨결에 시작된 인생 2막의 서막

    [코이카 해외 봉사] 내가 다시 낯선 나라로 떠난 이유 — 얼떨결에 시작된 인생 2막의 서막

    남들보다 조금 일찍 은퇴를 결정했던 건, 내 인생의 두 번째 막을 한시라도 빨리 열어보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만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평소 소심한 성격이었던 나에게 ‘해외봉사’란 두려움 그 자체였다.

    어느 날, 세상 물정에 밝고 뭐든 똑부러지던 친구가 KOICA(코이카) 봉사단 이야기를 꺼내며 나를 설명회장으로 데리고 갔다. 설명회를 듣고 나오는 길,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외국어 한마디 제대로 못 하는 내가 어떻게 저렇게 거창하고 큰일을 할 수 있을까. 늘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친구에 비해 나는 겁부터 났다.

    그래도 용기를 내어 서류를 제출했다. 어찌어찌 1차 서류 합격, 2차 면접 합격까지 지나갔는데 최종 건강검진에서 ‘재검’ 통보를 받았다. 과거 수술 이력이 있었던 터라 덜컥 자신감을 잃었다. ‘그럼 그렇지. 그저 내 건강 상태를 점검해 본 귀한 기회로 삼자’ 하며 마음을 비웠다. 사실 누구에게나 흔히 나올 수 있는 검사 결과였지만, 큰 기대를 하지 않으려 애써 마음을 다독였던 것 같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최종 선발 통보를 받았다. 정작 나를 이 길로 이끌어주고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친구는 1차에서 떨어지고, 얼떨결에 나만 혼자 남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눈앞이 아득해졌다. 당장 언어가 걱정되어 부랴부랴 벼락치기를 해보았지만, 평생 안 되던 외국어가 벼락치기로 될 리 만무했다. 게다가 국내 교육장에서 만난 예비단원들은 그야말로 우리나라의 엘리트들만 모아놓은 것 같았다. 쉰을 넘긴 나이에 그 뛰어난 젊은이들 사이에 있으니 스스로가 한없이 작게 느껴졌다.

    그렇게 추위가 매섭던 2018년 겨울, 성탄절을 딱 일주일 앞두고 르완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공항에서 가족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데, 슬픔보다는 ‘내가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긴장감이 온몸을 짓눌렀다.

    24시간이 넘는 비행 끝에 도착한 르완다의 공항은 마치 한국의 작은 간이역 같았다. TV 구호 방송에서 보던 열악한 풍경이 펼쳐질 줄 알았는데, 의외로 아프리카의 모범국가답게 깨끗하고 차분한 도시의 첫인상이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진짜 현장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임시숙소에 여장을 풀자마자 빡빡한 현지적응 훈련이 시작되었다. 현지 안전 수칙부터 생소한 ‘키냐르완다어’ 교육까지 진행되는데, 익숙지 않은 영어조차 잘 들리지 않는 마당에 전혀 모르는 현지어가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훈련이 끝난 후, 동기들은 각자의 파견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내가 파견된 곳은 청각장애인 학교였다.

    현지어에 적응하기도 전에, 이곳에서는 ‘수화’라는 또 하나의 새로운 언어를 배워야만 했다. 돌이켜보면 파견 초기 나의 하루는 온통 ‘공부’ 또 ‘공부’뿐이었다. 눈을 뜨면 마주치는 온통 낯선 검은 피부의 사람들, 그리고 통하지 않는 언어 속에서 외로운 적응기를 버텨냈다.

    하지만 이론만으로는 현장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었다. 부딪치고 깨어지며 나는 비로소 봉사의 참 의미를 배워가기 시작했다.

    낯선 땅의 언어와 문화는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품어야 한다는 유연성을 배웠고, 없으면 없는 대로, 있는 것에 만족하고 자족하는 법을 터득했다. 내 조바심을 내려놓고 현지인들의 눈높이와 속도에 맞춰 걸어가는 내려놓음의 여유를 알게 되었으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뜻밖의 순간에 빛을 발하는 나만의 창의력을 발견하기도 했다.

    파견 6개월 차, 활동 평가회에서 오랜만에 동기들을 다시 만났다. 헤어진 가족을 만난 것보다 더 가슴이 벅차올랐다. 무엇보다 내 나라 말인 ‘한국어’로 마음껏 수다를 떨 수 있다는 사실이 눈물겹게 감사했다. 그런데 단어가 금세 떠오르지 않아 버벅거리는 나를 보며 ‘이제는 0개 국어가 되어가는구나’ 싶어 피식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국내 교육장에서 그렇게 유능해 보였던 엘리트 동기들도 현지적응에 애를 먹으며 저마다의 애환을 털어놓고 있었다. 속으로 가만히 생각했다. ‘어라, 다들 이렇게 힘들어하는데… 의외로 나만 잘 버티고 있는 건가?’ 소심했던 내가 뜻밖의 단단함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적응을 마치고 활동을 1년 더 연장하여 르완다에서 살아간 지 15개월째 되던 해, 전혀 예상치 못한 불청객인 Covid-19(코로나19)가 전 세계를 덮쳤다. 국경이 닫히고, 마치 전쟁터 같았던 키갈리 국제공항의 인산인해를 뚫고 특별기편으로 급히 귀국길에 올랐다.

    긴 긴장감 끝에 무사히 도착한 한국의 인천공항. 화장실에 들렀다가 따뜻한 비데가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고였다.

    ‘아, 내 나라 대한민국… 참 장하다.’

    겁 많고 소심했던 쉰 넘어의 도전. 르완다에서의 15개월은 그렇게 강렬하고 뜨거운 기억을 남긴 채, 내 인생 2막의 잊지 못할 첫 장으로 기록되었다.

  • [코이카 해외 봉사] 바람의 딸을 꿈꾸던 소녀, 60에 낯선 땅에 서다

    [코이카 해외 봉사] 바람의 딸을 꿈꾸던 소녀, 60에 낯선 땅에 서다

    평범함이라는 가장 강력한 무기

    가슴 한구석에 꼬깃꼬깃 접어두었던 지도 한 장이 있었다. 젊은 날, 나의 청춘은 뜨거웠고 마음 한편은 늘 세상을 향한 발걸음을 갈망했다. 당대 청년들의 마음을 흔들었던 종군 기자 이진숙의 기록과 ‘바람의 딸’ 한비야의 책장을 넘길 때마다 가슴이 뛰었다. ‘언젠가는 나도 저 너머의 세계로 떠나게 될 거야.’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품었던 그 꿈은 그러나, 일상이라는 거대한 현실과 치열한 직장생활의 무게에 밀려 서서히 묻혀갔다.

    오랜 세월이 흘러 은퇴라는 이름표를 달았을 때, 잊고 살았던 그 불씨가 불쑥 고개를 들었다. 첫 번째 낯선 땅이었던 르완다에서 온몸으로 부딪히며 모든 소명을 다 쏟아부었다고 생각했다. 한국으로 돌아와 익숙한 삶의 평온한 울타리 안에서 여유를 누릴 줄 알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마음 깊은 곳의 불씨는 죽은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 깊은 곳에서 또다시 떠나고 싶다는 뜨거운 충동이 솟구쳤다. 일상의 안일함이 길게 이어질수록, 오히려 내 안의 세포들은 더 거칠고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던 그 대지를 그리웠다. 르완다에서의 경험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의 서막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다시 짐을 꾸렸다. 이번에는 아프리카가 아니었다. 남미였다. 지구 반대편의 거친 대지, 페루였다.

    그렇게 인생 2막의 두 번째 낯선 땅이 시작되었다. 처음 페루 안데스의 정기가 흐르는 우아누코 땅에 발을 디뎠을 때의 공기를 기억한다.

    영어가 거의 통하지 않는 곳.

    온통 스페인어뿐인 그 거대한 대지 위에서 내가 아는 단어라곤 기초적인 몇 마디가 전부였다. ‘소통이 안 되는 이 낯선 도시에서, 과연 내가 살아갈 수 있을까?’ 막막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사방이 산맥으로 둘러싸인 낯선 대지 앞에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자괴감이 밀려들었다. 현지에 도착해 마주한 세계는 너무나 넓고 찬란했다. 그 찬란한 국제적인 환경 속에서 홀로 빛을 잃은 듯 작아진 나를 발견했다.

    ‘나는 그동안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았구나. 왜 더 일찍 이 넓은 세상으로 떠나오지 못했을까.’ 그저 평범하게 살아왔던 삶이 후회스러웠다.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만 같아 작아지고 초조해지는 날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 절망의 바닥을 지나면서, 뜻밖의 깨달음이 찾아왔다. 시간이 흐르고 흙먼지 날리는 우아누코의 일상에 스며들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통째로 뒤집히기 시작했다. 가난을 느끼는 기준이 변했다.

    화려한 편의와 많은 소유가 없어도, 가진 것 안에서 스스로 밥을 지어 먹고 안데스의 거친 고원의 산세를 두 발로 묵묵히 걷는 일상만으로도 삶은 꽤 괜찮게 흘러갔다.

    내 손으로 하루를 꾸려가는 충만함이 차올랐다.

    그때 비로소 뼈저리게 깨달았다. ‘내 삶의 질은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구나.’

    이 단단한 생각의 뼈대가 세워지자 신기하게도 외부의 시선이나 결핍감은 더 이상 나를 흔들지 못했다. 물론 언젠가 한국으로 돌아가면, 세상은 여전히 그들만의 속도와 잣대로 나를 평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관없다. 이 낯선 땅에서 온몸으로 부딪히며 얻어낸 생존 감각은, 세상을 더 깊고 넓게 품을 수 있는 가장 귀한 자양분이 되었으니까.

    문득 이런 생각이 스친다. 지구 반대편의 낯선 도시 한복판, 혹은 무인도에 툭 던져진다 해도, 이제 나에게는 나만의 방식으로 일상을 재건할 가장 강력한 무기가 생겼다. 거창한 무언가가 아니라, 스스로 살아내는 이 단단한 내면 말이다.

    그리고, 세상의 풍파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나를 지탱해 주는 힘이 바로 그 평범함에 있다는 것을 이 거친 대지에서 배웠다. ‘평범하게 산다는 게 가장 어렵다’던 어른들의 그 깊은 뜻을, 비로소 지구 반대편의 흙먼지 속에서 온몸으로 통과해 낸다.

    두 번째 낯선 땅, 페루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오늘도 나는 그 평범하고도 단단한 온기와 나다운 속도로 살아내고 있다.